20강, 갈 5:1-6, 자유로의 부르심
사라 계열 vs. 하갈 계열. ★ 은혜는 하갈 계열의 것이 아니라 사라 계열의 것이다! ★ 사라 계열에 미래가 있다! “불임, 가난, 주변인이 더 풍성한 열매가 있고, 부유하고, 강해지리라.” @사54:1, 갈4:27.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으리라.”
★ 하나님의 구원은 스스로 훌륭하지 못하다고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위해서만 주어진다! # 율법을 지키는 종교는 고상한 자, 능력자, 도덕적인 사람, 강한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 복음의 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오직 믿음.
★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고 괴롭히다. “이제도 그러하도다.” 율법주의자가 복음과 은혜 안에 있는 자를 괴롭힌다.
이제 더 이상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칭찬을 듣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행위에 매달려야 하는 압박감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축복들과 유업들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가지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적극적인 자유: 자유롭게 된 목적지: 자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함.
예수님을 구세주로는 잘 믿지만 나의 주요 왕으로는 잘 안 믿습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좋아하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 환영이지만, 그렇게 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 있게 되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다 무엇이냐 하면,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도 아니고, 그런 믿음은 참된 믿음도 아닌 것입니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내는 식의 약삭빠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내가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심각하게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 잘못된 생각: 은혜도 믿어야 하지만, 진정한 행함도 따라와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참된 은혜를 받고 깨닫고 누린 자는 자연스럽게 어떤 삶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참된 복음을 깨닫고 믿은 자는 반드시 은혜 아래서 기쁨과 감사와 평안을 느끼면서 성령을 따라 살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가, ▶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가 무엇인가를 깊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가고, 알아가야 만이 우리의 신앙은 회복되어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인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눅15장. 탕자의 비유
마치 내가 날개를 자원해서 자른 것 같이 다른 많은 권리들을 양보한 것 같이, 희생한 것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힘들고,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무언가를 해야 할 때도 있고,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 기쁨과 감사보다도 원망과 불평이 솟아오를 때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자유로운 삶이다” 하는 말에 “정말 그렇다”라고 동의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자유인가? (눅15장 탕자의 비유)
잘못된 자유의 결과: 탕자는 아버지의 보호 밑에 있는 것을 속박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아버지의 보호 밑에서 벗어나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책임지기로 하고서 자기 몫을 물려받고 먼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도리어 비참한 종이 되었습니다. 돼지 사료도 먹지 못하는, 그래서 주려죽게 된 비참한 자신의 처지와 품꾼이지만 아버지 보호 아래 있는 자들의 풍요로운 상황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려는 자들의 비참한 말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타락하는 것이고, 죄의 종이 되는 것이고, 마치 부모 없이 버려진 고아와 같이 비참함과 불행함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아들을 보면서 “매일 잔소리하고 구속하는 부모가 없어서 참 행복하겠다”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오히려 부모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야 할 아이들이 부모 없이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와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참함과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달아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유로운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묵상: 우리 안에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 또 자기 의와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어도 십자가 은혜 없어도 잘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