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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교회 류광열장로님 취재

 

나는 그리 걱정이나 근심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가장 크게 걱정한 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의 아내인 홍인순 장로가 아팠을 때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당신께로 인도하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교통사고가 나기도 하는 등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일하신다. 나를 하나님께로 이끄셨던 방법 역시도 내겐 매우 특별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그 특별한 애정과 사랑을 지금까지 느끼고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던 아내는 어린 나이에 실질적 가장이 되어 농사를 시작하여 성공적인 영농인으로 성장하고 있던 내게 시집을 왔다. 당시 나는 보름간 가나안농군학교에 입소하여 마음을 가다듬은 이후 식물에 대한, 그리고 생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농업에 힘을 쓴 덕에 농어촌 모범 청년으로 국가에서 선정된 1인이었다. 그 덕에 나는 해외여행조차 자유롭지 않던 시절임에도 1966년도 즈음부터 선진국의 농업을 익히기 위해 해외로 탐방을 다녔고 그러한 나의 모습에 아마 착각을 해서 아내가 시집을 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농사꾼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을 터였다. 농사와 축산에 더하여 일꾼 및 교육생들을 매 끼니 책임지면서 아내는 억척스런 시골 아낙네가 되어갔다. 한 번은 새농민회에서 수여하는 종합상 대상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한껏 들떠있던 나와 달리 울고 있는 아내를 보며 오랜만의 외출, 혹은 차창 밖의 풍경이 주는 감동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당시가 1979년도였으니 결혼한 이후 9년가량 지난 후였다. 그러나 사실 아내는 차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곱던 처녀에서 억척스런 아줌마가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던 것이었다. 결혼 이후 성공만을 위하여 달렸고 이를 위한 아내의 고생과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살았던 나는 그제야 그러한 나의 모습을 반추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회한은 그리 단순하게 끝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아내는 어지러움증을 호소하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껏 영농인의 아내로 고되게 살면서 심신이 지쳤을 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증세는 전국의 병원이란 병원은 모두 다녀보아도 차도가 없었고, 그렇게 3, 4년간이나 아내는 매일 밤잠을 설치며 투병생활을 했다. 어쩌면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혜롭지 않은 나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릴 적 다녔던 교회를 나가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끈질긴 부탁과 권유에 아내 역시도 교회를 나가기로 결심하고, 1984년 1월 14일 삼성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교회라는 공동체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부부를 너무도 반갑게 환대하는 성도들 덕에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간절하게 아내의 회복을 간구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적처럼 아내는 약 3년 만에 처음으로 숙면을 취하게 되었다. 그 후 점차적으로 아내는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완치가 되는 기적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충성과 순종의 서원을 하게 된다. 아내가 농담 삼아 하는 말처럼 정말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시려고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쳐서 고집 센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것 같다. 그토록 나를 찾으셨던 하나님께 감사하는 한편, 나 때문에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던 아내에게는 항상 미안하다.

 

그 일 이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나는 매주 주일 성수를 하면서 내 삶의 패턴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교회를 섬기면서 1992년 새 성전 신축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은 나에게 큰 은혜의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껏 잊고 있었던 아내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고 감사하게 되었다. 그 덕에 지금도 서울서북노회 장로회와 노회 활동을 하면서 모든 시상 및 여행은 부부동반으로 진행한다. 이는 어떠한 일이건 뒤에서 조력한 아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수고한 아내 역시 남편과 함께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나의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아내의 병환 이후 내 삶에 있어서의 변화는 이토록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내의 회복 이후 믿음생활과 더불어 나의 생활 역시도 좀 더 정돈되기 시작했고, 이와 맞물려 나의 사업 역시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당시 나는 축산업을 하면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축산업을 위한 토양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확인요! 문맥이 반대임!) 호주와 뉴질랜드를 다니며 견학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의 기후와 토양은 축산업에 적절하지 않았다. 축산에 있어서 풀이 잘 자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이 든 상태에서 5-6일만 지나도 풀이 시들시들해져서 문제가 많았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중에, 예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양만(뱀장어 양식)사업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 사업 시작 전부터 외국을 돌며 시장조사와 설비 시설 등을 견학하는 등 철저한 사전준비를 했고, 한국에 돌아와 양만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농업과 축산업은 완전히 접고 새로운 사업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장어는 불티나게 팔렸고, 특히 일본에 수출을 시작하면서 사업은 점차 번창하게 되었다. 아내의 회복으로 가정이 안정되고, 사업까지 안정을 찾으면서 말 그대로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나의 노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곳에서 대외적으로 칭예를 얻게 되었다. 1985년에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사회발전 유공자로 인정받아 국민포창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국가 발전 유공자로 인정받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는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외에도 장한 한국인 대상, 무궁화대상 등 그야말로 상복이 터졌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작은 농업인의 성공과 사회발전을 위한 노력을 인정해주었다. 이러한 정신없는 나날 속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은 점점 잊혀 갔다. 성공한 생활에 취해 하나님께 고백한 감사 서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을 잊고 살던 내게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나와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일하셨는데 그것이 1996년의 일이다. 당시 여름 하늘이 뚫린 것 같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장대비는 연일 계속되었다. 이는 나의 전 재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장어 양식장을 잠기게 했다. 폭우는 그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계속되었고 급기야 집이 잠기고 양식장은 모두 파손되어 키우던 장어들이 모두 논바닥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폭우 속에서 인간은 참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간에 이루었던 수많은 성공이 언제 있었냐는 듯 재산이 순식간에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3년간 우리 가족은 옷, 라면, 그리고 쌀까지 모두 남에게 얻어먹어야 했고 어느 때보다도 힘든 삶을 살아내야 했다. 걱정은 물론 눈물도 없던 내가 그 당시에는 양식장 뒤에서 참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를 가장 낮은 자리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다. 세상적인 성공에 교만해져있던 나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훈련시키셨던 것이다.

 

한순간 알거지가 된 나는 다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당시 내게 유일한 위로는 성경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ⵈ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장 10절)

 

절망 가운데서 나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하나님의 위로였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기도로 다시 재기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1999년, 부족한 나를 장로로 세워주셨고, 농업인의 경제·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조직된 전국새농민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게 하셔서 농민지도자들을 이끌고 나가는 중책을 맡기셨다.

뿐만 아니라 나의 아내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먼저 나서서 폭우에 떠내려가고 남은 장어를 팔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물었지만 장어가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내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난을 인내하고 끝까지 인내했던 욥에게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부어주셨던 하나님. 나는 그 힘든 순간에서도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점차 장어의 맛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주말에는 대기표를 받고 3시간씩 기다리는 손님까지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업의 번창에 힘입어 2004년도에는 세계 최첨단 고밀도 양식장을 건설하게 된다. 무항생제, 무소독, 무균에서 세계 최고 명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우리나라 양식사업 사상 획기적인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나는 그 최첨단 고밀도 순환여과식 양식시스템에서 키운 장어의 이름을 ‘신천(信天)장어’로 지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믿음의 표현을 담고 싶었다.

 

이와 같이 성공을 위해 삶에 전념하는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2005년에는 정상궤도에 오른 사업을 내려놓으면서 그간 소홀했던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기로 다짐했다. 그간 제대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교회 교단 노회와 장로회 활동에 다시 열심을 다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사용하셔서 짧은 기간에 서울서북노회 고양·파주·연천장로회 회장이란 중책을 맡겨주시고, 2009년에는 장로 부노회장으로 선출되게 하셨다.

 

2010년도부터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워진 갈릴리농원을 명실공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농원 뒤쪽 산을 개발해 ‘홀리(Holy)동산’으로 꾸밀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묵상할 수 있는 산책로와 농원을 찾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세미나실과 기도실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영성의 전당’을 마련하는 것이 내가 소망하는 바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그 역사가 100년이 넘어가고 있고, 세계 대형교회 50개 중 가장 큰 교회들이 한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많은 일들을 이루어냈다. 나의 삶이 그러했듯, 이러한 성공의 순간에 우리는 쉽사리 하나님을 잊고 중심을 잃게 된다. 이러한 때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더욱 긴장해야 하고 그 역할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교회 일은 그 방법도, 목적도 그리고 결과도 옳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순종이 기반이 되어야함은 사실이다. 마치 군대에서 대열을 갖추는 것이 기본이듯 순종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덮어놓고 순종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지위나 행정, 정책을 비롯하여 목회자는 성도들을 동기부여 해야 하고 깨달음을 줘야 한다. 무작정 따라오라고 리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성격과 인격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그 인격체를 바르고 옳게 하나님께서 원래 세우신 대로 복귀시키는데 있어 동기부여와 깨달음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로의 개혁 보다는 제대로 잘 정립되어있는 기존 제도 안에서 소통의 부재로 인한 운영의 문제를 개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소통의 부재는 독단을 낳게 된다.

 

내가 현재 섬기고 있는 삼성교회 역시 현재 부흥할 수 있는 성숙기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이전까지 가난한 시절, 어려운 시절을 겪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안정기에 이르렀고, 이럴 때일수록 이를 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잘 일하시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교회 역시도 경영의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단계에 왔다. 교회의 구성, 조직, 경제, 시스템 등 교회는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고 이를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계획이 필요하다.

 

나는 본래 농사꾼이다. 농사꾼은 농업의 경영인이자 실제 생산자이기도 하고,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을 전담해야 한다. 이 때문에 농업은 그 경영에 있어 어려운 점이 많다. 현재 교회도 모든 경영과 말씀, 조직에 관한 것을 목회자가 전담하기 때문에 목회자에게 주어지는 부담이 많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소통의 부재로 인한 경영의 어려움이 있을 경우 독단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조직화와 시스템화의 필요성이 자명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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