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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웅목사 목회회고

 

  나는 본적이 신학교수로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 재직 중 1995년 9월 당시 일산 이산포교회에 담임이셨던 이**목사의 중재로 안용기 장로와 류광열 장로께 소개되어 갑자기 공석이 된 목회자 대신 임시로 설교를 담당하도록 위임을 받게 되었다. 나는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로서 되도록 빨리 후임 목사를 청빙토록하고 물러났어야 했는데 차일피일하며 5년 가까운 세월을 미적거렸음을 지금도 자책하고 있다. 이렇다 할 목회 경험도, 강한 소명의식도, 열성도, 방향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되는대로 지내며 그 중책에 소홀히 했음을 하나님과 성도들께 고백하며 뉘우치고 회개한다.

 

  이전 담임 김의종 목사께서 아마도 당시 파주는 물론이고 일산을 포함해 고양 전체에서도 한 손에 꼽을 만큼 훌륭한 교회당 건축하시느라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준공예배도 드리지 못하시고 갑자기 사임하고 떠나신 상태였다. 교회 건축을 하게 되면 많은 경우 교회에 시험이 닥쳐 분란이 생기게 되는데 삼성교회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김의종 목사께 대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고, 그때 그 분이 계속 사역하셨으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안에 조금 남은 빚을 청산했고 온 교우가 화평하며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저 감격하며 감사할 따름이다. 매년 부활절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주변의 대여섯 교회가 합동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항상 삼성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자주 모여 함께 배도 채우고 때도 빼며 친목할 수 있었다.

 

  한국에 소위 IMF 위기가 닥치기 전 교회 주변지역에 전원주택들이 들어섰고 서울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전도도 하고, 혹시 서울의 교회로 출석하는 교인들이 있으면 삼성교회로 옮기도록 권해볼까 하여 가가호호 방문을 하였는데 절망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교인들이 불신자들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더 쌀쌀맞고 배타적이기도 하다. 문을 두드리면 빠끔히 문을 열고 “어떻게 오셨어요?” - “저는 이 동네 삼성교회 목사입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도 교회에 나가요.” 하고는 문을 꽝 닫아버렸다. 내 손이 문틈에 끼일 뻔한 적도 있다. 아마도 그들의 담임목사가 타 교회 목사는 모두 늑대들이니 문도 열어주지 말라는 식으로 교육한 것은 아닌지.

 

  그래도 눈물겨운 감동도 있었다. “갈릴리 농원을 지나 문산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 언덕 너머에 새로 이사 온 한 부부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아주 금슬이 좋아 늘 함께 트럭을 타고 다니며 고철을 수집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나는 그분들의 간증을 지금도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전해주곤 한다. 그분들은 오랫동안 집에 신주단지를 모시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그것을 내다버릴 결심을 하고 차에 싣고 동해바다로 향했다고 한다. (혹시 서해라고 했는지는 분명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차를 운전하는 분의 목을 조이더란다. 그러나 그는 “안돼. 너는 오늘 우리와 끝장이다.”라 속으로 외치며 바닷가에 이르러 다시 배 한 척을 빌려 타고 먼 바다로 나가 그 신주단지를 내던졌다고 한다. 나는 항상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그 부부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으며, 두 분이 생각날 때마다 우리가 대적해 싸우는 것은 혈과 육의 것이 아니라 악의 권세에 대항한 것임을 다짐하곤 한다.

 

  60세쯤 된 어머니와 40세 전후의 딸 모녀가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딸이 악령에 붙들려 몹시 고생하고 있었다. 흔한 일종의 정신질환이 아니라 분명 일러 “귀신이 들린” 상태였다. 나는 그녀가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교회 주변 동네의 불신자들에게 있어 회개의 불길이 일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리라는 믿음과 소망 안에 5년여 내내 기도를 했다. 여러 번 교인들과 합심하여 애타게 간구해 보기도 했으나 끝내 성과를 보지 못했다. 나는 장로교 통합측 총회의 위촉을 받아 25년여 전 침례교 성락교회 김기동목사에 대한 이단성 연구위원회 일원으로서 보고서의 서문을 작성한 적이 있다. 나는 내 자신이 그의 귀신론을 문제시하고 경계했던 김기동 목사에게 이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가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또 한편, 내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께서 그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 주시리라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믿고 바라던 그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나는 지금도 늘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있고, 일면 무력감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모녀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종종 주일 저녁예배 때 교인들이 십여 명씩 차례로 찬송가를 독창하곤 했는데, (그때 그 반주를 하던 자매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이름이 정순이라 했던가?) 은혜와 감동이 철철 넘쳐났다. 특히 노인들의 독창은 박자와 곡조가 실로 독창적이었고, 영혼들을 울리고 웃겼다.

 

  내 본가가 서울 녹번동에 있었는데, 부부가 “분방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어기고 일주 닷새 엿새를 교회 사택에서 독처하며 지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여러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다. 두 권사님들을 비롯해 여러 성도께서 차려주신 음식을 섭취한 덕분에 필경 지금도 내 나이답지 않게 이토록 근육이 탄탄하고 골수가 꽈 차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일생 그때처럼 잘 먹은 적은 없다고 단언한다. 이름들이 가물거리긴 해도 이미 소천한 성도들을 비롯해 한 믿음 한 소망 안에 한 아버지의 한 사랑을 받으며 서로 나눈 그 사랑을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일일이 그 이름들을 열거하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되살리고 싶으나 끝이 없을 것 같고, 행여 한 성도의 이름을 빠뜨려 실족케 만드는 우를 피하기 위해 삼가는게 좋겠다.

 

  교회사편찬 작업에 있어 내가 시무하던 기간의 자료들이 별로 없어 큰 공백을 이루게 될 것 같아 몹시 죄송하다. 나의 타고난 품성 자체가 무질서하고 무책임한 탓에 마땅히 정리하고 보관했어야 할 서류와 자료들을 제출할 수 없어 참으로 안타깝고 미안하다. 그러니 그 기간에 대해서는 “엉터리 목사로 인해 목회상의 공백기를 겪게 되었으나 주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은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라고 기재하면 어떨지.

 

  누군가 나를 가리켜 “도인, 자유인, 기인, 천재”라 한다는데, 기실 그 모든 말이 목사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간단히 “엉터리”라고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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