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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부흥에 힘쓴 이세용 목사

 

이세용 목사는 격동기 7-80년대에 삼성교회를 맡았던 목사이다, 그는 파주에서 태어나 파주를 떠나지 않고 지역을 섬긴 목사이다. 장신대 졸업 후 신대원을 갈까 목회를 할까 고민하던 중 서울 다녀오는 길에 임진교회 박찬석 당회장 목사를 만나 삼성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삼성교회에서 부임설교를 했을 때 민간인보다 군인들이 많은 교회라서 실망과 고민을 했으나, 야학교사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모교회(백석교회) 김달훈 목사님과 상담하고 탁아소를 해보자는 동네 여청년들과 탁아소하는 것으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목사는 탁아소를 자신의 생활비를 털어 어린이 용 도서를 서울 청계천가서 사가지고 올 만큼 열심히 운영하며 동네의 제일가는 탁아소를 만들어 후에는 삼성어린이집으로 명칭을 바꾸어 삼성교회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삼성교회에서 어린이집 운영 시 당시 원아들의 부모는 10%가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자모회장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목사는 자모회장이 군부대의 소령부인임을 알고 지혜롭게 기도하며 기다린 결과, 10년이 지난 뒤 부산에서 만났을 때 자모회장은 부산의 한 교회의 집사로, 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세용 목사의 사역 중 돋보이는 사역은 군부대 설교를 통해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민간인 교인을 부흥시킨 것이다. 이세용 목사가 부임했을 때 고민도 군인이 민간인보다 많은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이세용 목사가 부임하자 그 지역 부대에 부대 교회, 예배처가 생겨 자연스럽게 군인들은 부대에서 예배를 보고, 민간인들도 삼성교회에서 예배를 보게 된 것이다. 당시 이세용 목사는 주일날 아침 9시, 11시, 그리고 오후 2시에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아침 9시와 오후 2시 예배는 275 부대와 근처 부대 예배처에서, 11시 예배는 삼성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였다. 부대설교를 하면서 최동일 대대장과의 인연이 깊었는데 1980년, 교회사택을 최동일 대대장 부대의 도움으로 지은 것이었다. 사택을 건축할 때, 제직회의 반대가 있었지만, 서울 서노회 여전도회 회장인 선우영자 권사의 도움, 그리고 탄현교회 나상욱 장로의 도움으로 흙벽돌로 된 사택을 지을 수 있었다. 탄현교회 나상욱 장로는 교회 부지기초 공사를 담당했고. 최동일 대대장 부대의 군인 중 미장일, 목수일 잘하는 병사가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지었다며, 당시 계엄령으로 인한 군인들의 수월한 도움 등이 다 하나님이 도우심이라고 이세용 목사는 회상한다. 또, 사택을 지으면서 지금의 삼성교회 주소를 문지리에서 금승리로 이전했다.

 

이세용 목사가 민간인 부흥에 힘쓴 것은 했던 전도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목사는 교회주보와 인사말 적힌 프린트, 그리고 전도지 이렇게 3개를 세트로 묶어 10 가정에 우편으로 보냈다. 세 가정이 예수를 영접하는 열매를 맺었으나, 현재 남은 교인은 유장로 가정뿐이다. 유장로가 바쁜 것을 안 이 목사는 조급해하지 않고 유장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기도로 기다렸다. 당시 몸이 안 좋았던 유장로 부인인 홍장로의 몸이 교회 나오면서 회복되자, 이 목사는 유장로에게 바쁘면 주일 저녁에만 나오라고 권유했고, 유장로는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주일 저녁예배, 주일 낮 예배까지 빠지지 않고 출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목사는 시간이 날 때면 동네를 돌아다니면 동네주민을 전도하였는데 전도하는 이목사에게 할아버지 한 분이 와서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하지 말고 연애당이라고 해”라는 말을 건넸다. 이목사는 “교회가 연애당 맞네요.”하고 맞장구를 친 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마을이 교회보다 먼저 생겼고, 연애 먼저 시작했고, 그 물꼬가 잠시 교회로 흘러온 것인데 어찌 교회를 연애당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마을이 연애마을이지”하며 할아버지를 말로서 교회의 정당함을 이야기했다. 이 목사는 당시를 생각하며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할아버지를 통해 이 마을의 역사를 알게 하신 것 같다고 말한다.

 

이세용 목사는 마을사람들과 대화하기 좋아하고, 마을사람들의 바쁜 일손을 도우며 교회와 사택을 금승리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일손이 부족한 마을 사람들의 사정을 알기에 아침부터 일손 도와달라는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일손을 도와주는 금승리 삼성교회의 반 머슴 목회자였다. 그러한 이목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삼성교회가 지역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이세용 목사는 격동기 7-80년대에 삼성교회를 맡았던 목사이다, 그는 파주에서 태어나 파주를 떠나지 않고 지역을 섬긴 목사이다. 장신대 졸업 후 신대원을 갈까 목회를 할까 고민하던 중 서울 다녀오는 길에 임진교회 박찬석 당회장 목사를 만나 삼성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삼성교회에서 부임설교를 했을 때 민간인보다 군인들이 많은 교회라서 실망과 고민을 했으나, 야학교사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삼성교회를 소개해 준 박찬석 목사의 질책과 탁아소를 해보자는 동네 청년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 목사는 탁아소를 자신의 생활비를 털어 어린이 용 도서를 서울 청계천가서 사가지고 올 만큼 열심히 운영하며 동네의 제일가는 탁아소를 만들어 후에는 삼성어린이집으로 명칭을 바꾸어 삼성교회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삼성교회에서 어린이집 운영 시 당시 원아들의 부모는 10%가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자모회장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목사는 자모회장이 군부대의 소령부인임을 알고 지혜롭게 기도하며 기다린 결과, 10년이 지난 뒤 부산에서 만났을 때 자모회장은 부산의 한 교회의 집사로, 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세용 목사의 사역 중 돋보이는 사역은 군부대 설교를 통해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민간인 교인을 부흥시킨 것이다. 이세용 목사가 부임했을 때 고민도 군인이 민간인보다 많은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이세용 목사가 부임하자 그 지역 부대에 부대 교회, 예배처가 생겨 자연스럽게 군인들은 부대에서 예배를 보고, 민간인들도 삼성교회에서 예배를 보게 된 것이다. 당시 이세용 목사는 주일날 아침 9시, 11시, 그리고 오후 2시에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아침 9시와 오후 2시 예배는 275 부대와 근처 부대 예배처에서, 11시 예배는 삼성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였다. 부대설교를 하면서 최동일 대대장과의 인연이 깊었는데 1980년, 교회사택을 최동일 대대장 부대의 도움으로 지은 것이었다. 사택을 건축할 때, 제직회의 반대가 있었지만, 서울 서노회 여전도회 회장인 선우영자 권사의 도움, 그리고 탄현교회 나상욱 장로의 도움으로 흙벽돌로 된 사택을 지을 수 있었다. 탄현교회 나상욱 장로는 교회 부지기초 공사를 담당했고. 최동일 대대장 부대의 군인 중 미장일, 목수일 잘하는 병사가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지었다며, 당시 계엄령으로 인한 군인들의 수월한 도움 등이 다 하나님이 도우심이라고 이세용 목사는 회상한다. 또, 사택을 지으면서 지금의 삼성교회 주소를 문지리에서 금승리로 이전했다.

 

이세용 목사가 민간인 부흥에 힘쓴 것은 했던 전도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목사는 교회주보와 인사말 적힌 프린트, 그리고 전도지 이렇게 3개를 세트로 묶어 10 가정에 우편으로 보냈다. 세 가정이 예수를 영접하는 열매를 맺었으나, 현재 남은 교인은 유장로 가정뿐이다. 유장로가 바쁜 것을 안 이 목사는 조급해하지 않고 유장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기도로 기다렸다. 당시 몸이 안 좋았던 유장로 부인인 홍장로의 몸이 교회 나오면서 회복되자, 이 목사는 유장로에게 바쁘면 주일 저녁에만 나오라고 권유했고, 유장로는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주일 저녁예배, 주일 낮 예배까지 빠지지 않고 출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목사는 시간이 날 때면 동네를 돌아다니면 동네주민을 전도하였는데 전도하는 이목사에게 할아버지 한 분이 와서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하지 말고 연애당이라고 해”라는 말을 건넸다. 이목사는 “교회가 연애당 맞네요.”하고 맞장구를 친 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마을이 교회보다 먼저 생겼고, 연애 먼저 시작했고, 그 물꼬가 잠시 교회로 흘러온 것인데 어찌 교회를 연애당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마을이 연애마을이지”하며 할아버지를 말로서 교회의 정당함을 이야기했다. 이 목사는 당시를 생각하며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할아버지를 통해 이 마을의 역사를 알게 하신 것 같다고 말한다.

 

이세용 목사는 마을사람들과 대화하기 좋아하고, 마을사람들의 바쁜 일손을 도우며 교회와 사택을 금승리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일손이 부족한 마을 사람들의 사정을 알기에 아침부터 일손 도와달라는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일손을 도와주는 금승리 삼성교회의 반 머슴 목회자였다. 그러한 이목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삼성교회가 지역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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