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서 만나리라, 요21장 1-14절, 2011년 8월 7일
윤덕영목사(부임설교)
기독교의 제일의 명절은 무엇입니까? 보통 종교의 최대 명절은 그 종교의 창시자의 탄신일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제일명절은 성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제일명절은 성탄절이 아니라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은 바로 주일입니다. 주일예배를 일요일에 드리는 이유가 바로 부활의 소망과 기쁨의 날을 예배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경건하게 묵상하는데 잘 훈련되어져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부활절기간의 그 기쁨과 승리의 환희를 누리는 법을 우리는 새롭게 배워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들은 얘기는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천사들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했을까요? 천사들은 또한 “갈릴리에서 너희가 부활의 주를 뵈오리라”(막16:7)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갈릴리 디베랴 호숫가에 일곱 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 둘(빌립과 안드레)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난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루살렘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3년간을 다니며 사역했던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곳 갈릴리 호수로 나갔습니다. “나는 고기잡으로 가노라” 하면서 베드로는 배를 타고 나가고 나머지 제자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처음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서 제자의 삶을 시작할 그 때처럼, 이번에도 날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주님을 뵈오리라”는 말을 들었으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자괴감에 도무지 주님을 뵈올 용기가 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어떻게 화해할지 도무지 자격이 없는 자라는 자책감이 밀려왔습니다. ‘나는 안돼. 구제불능이야.’ 그의 마음에는 도무지 재기할 수 없는 영적인 파산을 맞이했습니다.
날이 샐 무렵, 안개가 자욱한 곳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들아, 너희가 고기가 좀 있느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없습니다.”(요21:5) 이 대답은 마치 지난 3년간 열심히 예수님을 따랐으나, 허탈하게도 배신자요 패배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 했습니다. “얘들아”라고 부르신 부활의 주님은 목소리는 사랑과 정감어린 목소리였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했습니다. ‘너희가 비록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너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제자들의 빈 배와 빈 그물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열매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역에도 적용됩니다. 자기의 열심과 공로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참고. 롬3:23) “너희가 율법과 자기 의와 공로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있느냐?” “열매가 있더냐?” “고기를 잡았느냐?” 그 대답은 “없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율법과 자기의의 종교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중심으로 변화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힘과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느니라.”(슥4:6) 베드로가 자기 열심과 힘으로 주님을 따랐던 3년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님의 선물을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두 번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리고 오늘 본문에 실패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실 때였다. 첫 번째 따름은 실패로 끝이 났으나, 두 번째의 부르심에는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였다. 이는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법, 성령님과 순종함으로, 죄사함의 감격과 은총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옴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저도 제 힘과 저의 계획에 의지하여 목회할 때는 탈진하고 무의미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처럼 “고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과 성경말씀의 권위,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굳게 붙잡을 때, 비로소 목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나는 순종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접근과 성령님께 의지하는 사역은 그 결과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절)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을 때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사도 요한은 즉시로 “주심이시다!” 알아보았고, 행동파 베드로는 주님께도 뛰어들어서 달려왔습니다. 불과 100미터도 채 안되는 곳에 먼저 달려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뒤이어서 왔을 때, 제자들에게 보이는 것은 ‘숯불’이었습니다. 9절에 말씀합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9절) 왜 먼저 예수님을 만나러 간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서로 기쁜 만남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숯불이 보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물끄러미 ‘숯불’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베드로는 숯불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며, 예수님은 숯불을 준비했던 것일까요? 어느 주석가는 숯불, 생선, 떡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의 공생애 3년간의 베드로의 사역을 다 펼쳐놓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기를 잡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강론하실 때 배고픈 군중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사용하신 것도 생선과 떡이었습니다. 숯불은 바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으나, 결국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유월절 전날 밤 베드로의 실패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날 밤에 쬐었던 그 불과 숯불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 안쓰라키아(ανθρακια)입니다. 주님은 바로 베드로의 죄악의 기억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숯불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죄사함받은 은혜를 덧입고 회복하도록 지금 베드로를 영적으로 수술하시고 계십니다. 숯불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자신의 연약함에 너무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자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려고 베드로의 배신을 떠올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실수와 큰 과오를 치유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려고 그의 죄를 떠올리게 허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실수와 허물에 매여서 자책감에 빠진 사람은 주님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상처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역시 다른 사람을 상처줄 뿐 온전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역자로 세우기 이전에 그를 치유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장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는 베드로처럼 죄사함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을 통해서 맺힙니다. “사함을 많이 받은 자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느니라.”(눅7:47) 이처럼 베드로가 숯불을 바라보며 분위기가 무거울 때,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와라.” “와서 조반을 먹으라.”(12절) 원수나 배신자와는 결코 식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 식사교제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자야! 네 괴로움을 다 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안심해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조반을 차려서 제자에게 접대하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 눈물속에 모든 죄악과 허물이 씻겨지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오순절날 예수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모시기에 합당한 정결하고 거룩한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죄의 심각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총에 늘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의 비결입니다. 죄사함의 감격이 있는 자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의 향기나 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반 먹은 후에 그 유명한 질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반복해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으로 수제자의 이름이었습니다. 한편 시몬이라는 이름은 변화되기 전, 인간적인 자신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하셨을까요? 왜 세 번씩 이 질문을 하셨을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하시나이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했던 베드로의 입술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하신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배반한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다. 그리고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하셔서 교회를 맡기시는 감동스러운 장면이 오늘의 말씀이다. “네 양을 먹이라.” 모든 목회자의 첫 번째 사명은 사도적 가르침을 바로 가르치며, 거짓과 이단 사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수호하고 밝히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양식으로 성도들을 먹이라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부하고 계신다.
디베랴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만난 7제자들의 이름과 그 순서를 주목해보라.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로 이어진다. 모두들 하나같이 허물과 실수가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나다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메시아됨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모두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도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나다나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구주로 고백하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으며, 죄사함와 성령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사함의 감격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빈 배이며 빈 그물 같은 인생이 충만하고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셋째, 실수와 죄악으로 인한 죄책감을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치유받아 이제는 용서받은 죄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역의 첫단추는 바로 이 죄사함의 은총이며 감격입니다. 성령님 없이 자기 힘으로 주님을 따르던 첫 번째 부르심은 크나큰 실패로 끝이 났지만,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인도함을 받는 두 번째 부르심에는 놀라운 역사와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 이 시간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상한 심령에 사죄의 은총을 선언하여주옵소서. 과거의 무거운 짐을 다 씻어버리고, 오늘을 충만하게 살아가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어가게 하시며,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가운데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