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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웅목사 취재

 

처음 삼성교회에서 임시로 목회를 맡게 된 것은 사제간이던 당시 이산포교회 목사님 자제와의 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실질적으로 담임 목사가 아니었음에도 사택이 비어 있었던 상황이라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지 않고 사택에서 지내다보니 주일설교 이외에도 새벽예배, 심방 등 담임목회자가 할 일을 거의 도맡아하게 되었다. 설교부터 시작하여 다양하게 요구되었던 목회지에서의 사역과 더불어 학교로 강의를 나가야하는 나로서는 그 많은 직무를 모두 제대로 소화하기는 버거웠기에 그때의 나의 모습을 ‘엉터리’라고 표현함이 가장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버거움의 근간은 다문 조직신학을 공부한 신학자로써의 내게 흔히 기대할만한 딱딱함이라던가 진지함 따위에 있지는 않았다. 나의 성격 때문인지, 평소의 나는 그리 말을 어렵게 하는 편도 아니고 표현에 있어서도 쉬운 편이라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교수답지 않다는 평을 받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을 심층적이고 학문적인 부분과 연계해서 가르치곤 했다. 특히나 교인들 역시도 나를 어렵게 대하지 않고 충분히 이해해줬기 때문에 교회에 적응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살다온 내가 시골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되려 당시 IMF 직전에 한창 성행했던 전원주택지 등의 붐으로 서울출신의 인구가 다수 거주하게 되었고, 도시 인접지역의 경우는 그리 ‘시골’이라 표현할 만한 성격의 환경이 아니었다.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만나리라 생각했던 나는 초반에 가졌던 그러한 기대 때문인지 주민들이 소위 ‘되바라져’보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자교회 목사가 아닌 경우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통에 전도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던 셈이다.

 

한국교회는 성장위주의 성격이 강하여 개교회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다. 당시도 그러한 성격이 상당부분 드러나고 있었다. 대형교회가 여타지역 신자들을 자교회로 끌어오려는 쏠림현상을 조장하고 있는데다 심지어 신도시에서는 ‘떳다방’식으로 텐트를 수십 개치고는 저마다 자기교회로 신자를 끌어가려하는 행태를 보인다고 하니 잘못된 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마치 동화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염소’에서 늑대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라 당부하는 엄마염소처럼 자교회 만이 성령이고 교회를 떠나면 안 된다는 식의 사고 형성은 같은 교파 내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듯했고, 이는 큰 문제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문제는 기존 교회의 제직제도로 인해 가중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기게 되면 전 교회에서 집사이건 안수집사이건, 그 전의 공적에 대한 예우를 하지 않으니 어떡하건 한 교회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 그와 같은 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는 비은혜적인 행태를 양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교인들 역시도 교회가 가까운 것을 원치 않고, 심방도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많은 부분들이 교회신앙의 타락현상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당시 그 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전도를 하면서 이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삼성교회를 다시 떠올리면 내게 남았던 잔상들이란 무력감, 무능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당시 나는 그 지역을 강력하게 잡고 있는 정사, 악령의 권세를 느꼈었다. 교회에서 역시도 악령에 사로잡힌 여인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 여인을 위해 교인들이 합심해서 기도하기도 했지만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은 녹록치 않았다. 그 귀신들린 것을, 어떻게든 악령을 쫓아내려고 5년 내내 그야말로 하루도 가슴을 누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새벽기도 때도 늘 그 기도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성과를 보지는 못했고, 오죽하면 김기동목사에게 데려가 볼까 했었다.

 

당시 통합측 총회에서 박종순목사, 한철하교수, 김지철교수, 나 등등 이단문제 연구원은 자주 만나서 이단측 얘기를 하곤 했다. 총회 보고서의 서문은 내가 쓸 정도였던 내가 이단으로 처리받은 김기동 목사를 부를 정도로 해방의 역사에 대한 갈망이 컸다. 블룸하르트의 저서에도 귀신들린 여자아이가 회복케 되는 해방의 역사가 나오는데 당시 해결되지 않는 자매의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 만큼 나의 무력감이 매우 컸었다.

 

물론 김기동목사도 이단으로 처리되기는 했지만 그 분의 영성에 있어 존중할 부분이 있음은 사실이다. 이 세상의 투쟁은 단지 혈과 육의 투쟁이 아니라 정사자들의 악령과의 투쟁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설교 때마다 일종의 축사가 나와야 한다. 블룸하르트는 모든 심방을 갈 때에 하게되는 모든 상담 등도 전부 축사로 가야한다고 했다. 나를 사로잡는 영이 성령 하나님이냐 악령이냐와 같은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를 일방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다. 마틴루터가 얘기했듯 인간은 누군가 반드시 하나가 타고 다닌다. 성령이 타거나 악령이 타거나. 그는 중립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예수께서 주님이 아니면 악령을 주로 인정한 것이라며 그 둘 중에 하나라고 전했다.

 

사실, 당시에는 블룸하르트와 같은 선배 목사에게 일어났던 믿음의 역사가, 지역 사람들이 회개하고 기도하며 교회로 돌아오는 그런 기적이 내게는 왜 일어나지 않는 걸까 마음이 어려워지기도 했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무력감을 느꼈고 많은 선배 목사들이 체험했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는 볼 수 없는건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심이 되어야할 것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그 순간의 나의 마음가짐, 그리고 내 영의 방향설정이었다. 이 때문에 강대상에 올라갈 때는 내 안에 자리 잡은 영혼의 깃발을 물리치고 예수가 다시 승리의 깃발을 꽂는 그런 정권교체가 일어날 수 있게 끊임없이 구했던 것 같다. 물론, 사역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뿐만 아니라 사모로 섬기는 나의 아내였다. 교역의 70%는 사모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내의 헌신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나의 신앙적 성향은 종말적이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기복적인 성향의 설교를 할 생각을 않았던 것 같다. 이제나 그제나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 다 손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게 나의 가장 큰 소망이고 바라는 바이다. 매 예배 끝 무렵 축도 전에 ‘내 주 예수 세상으로 다시 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이 구절을 전부 서서 하늘 향해 손을 뻗고 찬양하고 끝내곤 했다.

 

나의 종말적인 신앙관은 철원의 한국 최초 수도원인 대한수도원을 세우신 나의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친은 당시 철원지역이 이북으로 편입되면서 삼각산에 임마누엘수도원이라 다시세우시고 결국 순교하셔 통합 측 순교자가 되셨는데, 당시 만드셨던 복음성가 120곡에는 주님은 언제나 오시려나 하는 애절한 갈망의 찬송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나의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블룸하르트의 이론 역시도 아버지로부터 전수받게 되었다. 블룸하르트는 교회가 한 생명 한 생명 죽는 데에 있어서 애타는 마음이 없이 몸집 키우기에 집중한 나머지 영혼의 구제에는 열망이 없는 현실을 꼬집는 주장을 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독일은 99%가 세례 받은 사람이었다고 할 만큼 독일은 막강한 기독교 국가였음에도 믿는 성도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당시 미신을 비롯하여 교인 중에서도 악령의 권세에 묶여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를 타개할 방법은 무엇인가? 성령의 강력한 강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그리고 교회가 다시 타락하고 떠났으니 이제 제 2의 강림을 고대해야 한다는 맥락이다. 한편으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고대해야하는데,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대다수의 전 인류가 멸망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는 문자 그대로 분명하게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간단하게 멸망이다. 그는 심지어 이 세상의 어느 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면 당신이 그 곁에 있겠다고 했다. 우리는 성령에 기대해야 하고, 성령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한 대대적인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물론 여기서 대대적인 구원의 역사는 기존의 교리와는 차이가 있다.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면, 일면 이를 고대하면서도 한편으론 대다수가 지금 오셨다간 큰일이라 생각하는 양면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인들에게도 능력을 줘서 대대적인 구원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오순절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 이 때문에 엄청난 이단시비와 모함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신학은 내게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다. 틈틈이 그분의 저서를 번역한 탓에 그의 생각이 나의 목회나 사역에 많은 부분 묻어났을 것이다.

 

종말론적 신앙의 성향 이외에도 내가 관심을 두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찬양이다. K 바르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찬양뿐이다.”라고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찬양 중에도 텍스트로 말 그대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내용을 담는 찬양이 많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노래 그 자체, 즉 그 멜로디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드리는 것이, 그리고 그럼으로써 내 삶을 마치는 것이 내 삶의 최고의 영광이라 생각한다.

 

당시 저녁예배 때 나이 많으신 어르신 분들께서 차례로 나와 찬양을 하곤 했는데, 그것이 참 은혜로웠다. 그때의 특송들은 녹음을 해두기도 했는데, 그렇게 찬양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매우 즐겼던 것 같다. 당시 수준급의 프로 반주자가 섬기고 있었는데, 어떤 음을 잡건 그대로 반주를 할 정도였다. 비록 때때로 시험도 찾아오고, 그 때문에 반주자도 떠나기는 했지만, 그러한 시험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은 참 놀라우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설교 방향부터 시작하여 제대로 갈피를 못 잡던 나를 이렇게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사하다.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당시의 목회 경험은 내겐 진정 행복한 시절이었다. 지적장애 요양원을 삼성교회 자체적으로 섬기면서 30-40명의 군인들을 인솔하여 함께 밥도 먹고 의미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당시 성도들의 정성스런 식사준비에 지금까지도 몸이 튼튼할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오금리 순복음교회, 한마음교회, 통일동산교회 등 같은 지역에서 시무하시는 네댓 명의 목사님들끼리 종종 만나 목욕도 다니고 식사도 하면서 친목을 다졌다. 이를 바탕으로 삼림교회에서 부흥사경회, 연합예배 등을 드리는 등 지역교회협의회의 성격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당시에는 목사님들끼리 하나님 일이 중심이었던 터라 서로 교인이 교회를 옮기는 일이 있더라도 이를 개의치 않았다.

 

당시 내 마음을 지금까지도 따뜻하게 만들었던 간증이 있는데, 한 집사님 부부의 사연이다. 50-60대의 집사님 내외는 늘 같이 트럭을 타고 다니시면서 고철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그런 부부였다. 이 분들은 평생을 집안에 신주단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이것을 불현 듯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강원도 동해안으로 신주단지를 싣고 차를 몰았다고 한다. 그런데 트럭을 몰던 형제님께서 갑자기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 순간 무슨 영문엔지 “이놈아 내가 오늘 너를 끝장을 보겠다.”라는 심정으로 끝까지 참고 운전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바다에 도착해서는 배를 빌려 배를 타고 바다 속 한가운데 그 신주단지를 내던지고 왔다고 한다. 그 이후 교회를 다니시면서 그분들이 보여주신 그런 열성과 친절,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고철이 용광로에서 나오면 마치 핏덩이가 나오듯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체험하는 듯 하다며 영적으로 열린 생각을 하시는 것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는다.

 

 

현재 나는 강원도 삼척에 거주하고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님께서 이곳으로 오실 것 같아 제일 먼저 만나려고 이곳으로 왔다.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자랐던 나는 하루에 노래를 부르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삼척에서 등대가 새벽 1시가 돼서야 나오는데 그때 즈음에 인적이 조금 드물어지므로 바다에 나아가 두세 시간 가곡과 동요 등을 부른다. 요즘은 동요를 주로 부르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와 ‘물방앗간 처녀’와 같은 작품을 좋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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