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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선집사 전산악권사 간증

 

전산악권사: 나는 서울에서 살던 1998년 1월 4일, 전도없이 혼자 처음으로 교회에 갔다. 그 때 갔던 교회는 서울 청파동에 위치한 청암교회였다. 원래 어머니께서 불신을 믿으셨기 때문에 청파동에 사는 동생이 교회에 다님에도 불구하고 우리한테는 전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또한 남편이랑 부모님이 우상을 섬기니까 나도 덩달아 교회에 가면 안 된다 생각하고 친구가 교회에 가자고 해도 안 나갔었다. 그러던 중에 시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많이 편찮으셔서 병원을 모시고 갔고 치매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다. 치매판정을 받고난 후 시어머니께서는 잠도 잘 안 주무시고 허튼 소리를 하시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은 평소 부모님께 참 잘하고 부지런해서 일을 안 나가는 날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 날(1998년 1월 4일) 아침은 어머님이 일주일째 잠을 못 주무시니까 마음이 상해서 일을 못 나가겠다고 했고, 그 때 나는 문득 교회에 나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교회에 다니고 있던 청파동에 사는 동생한테 전화를 했다. 동생은 갑자기 웬일이냐고 했지만 내가 갑자기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렇다니까 오전 11시 예배에 오라고 했다. 난생 처음으로 교회를 가게 된 것이다. 도착하니까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고 함께 교회에 들어갔다. 당시 청암교회가 건축단계에 있어서 지하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해주는 여자분들이 스무명정도 쭉 서있는데 교회가 처음이다 보니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매우 겸연쩍었다. 그래도 갔으니까 일단 따라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 동생이 교회에서 국수를 먹고 가라고 했지만 남편이 집에 있어서 가야된다고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까 그렇게 못 주무시던 어머님이 세상모르고 주무시고 계셨고 그 후로는 조금씩 주무시게 되었다. 이후 성북구에서 용산구까지 거리가 멀어도 주말이면 교회에 꼬박꼬박 나갔다. 그런데 남편이 형제는 얼마 없어도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주말이면 가야 할 결혼식이 많았다. 결혼식이 있는 날은 용산구에 있는 교회까지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 때문에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결혼식이 있거나 무슨 일이 있는 주일이면 집 근처 삼선동 명성교회로 새벽예배를 갔다. 새벽예배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다들 눈 감으면 나도 감고, 뜨면 나도 뜨고를 반복하고는 했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분이 오는 곳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꼭 나한테 하는 얘기로 들렸다.

 

전제선집사: 어느 날 아버지가 목욕탕에 가셨다 화상을 입으셔서 고대병원에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니까 목욕탕에서 갑자기 뜨거운 물이 나와서 몸에 크게 화상을 입으셨고 화상전문병원인 영등포한강성심병원으로 옮기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등포는 집에서 너무 멀기도 했고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라 어떻게 해야하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데 시립병원이 생각났고 시립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5월 29일부터 6월 5일까지 일주일정도 입원해 계시다가 아버지는 운명하셨는데 입원해 계실 때 청암교회에서 부목사님, 전도사님이 동생과 함께 병원에 찾아오셨다. 그 때가 5월이니까 아내가 교회에 다닌지 넉달이 되었을 때였다. 목사님이 와서 기도해주시니까 우리 아버지가 링겔을 꽂고 누워계시면서도 아멘을 하셨고, 다녀가고 나신 뒤에는 고통스러워하시지 않고 편히 주무셨다. 아내가 성경책을 읽어드리고 아버지가 고통없이 편안해 하시는 걸 보고 우리 아들도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운명하시기 30분 전에 아들이랑 며느리를 부르시더니 사이좋게 잘 살라는 말씀을 하시고 6월 5일 오전 11시 20분에 돌아가셨다. 장례는 기독교식으로 잘 모셨고 삼우제도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기독교식으로 지냈다. 그 때부터 쭉 차례나 제사는 모두 기도만 하는 추도식으로 지내고 있다.

 

이듬해인 1999년 3월에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 전에 성북구 삼선동에 살적에 지금의 코오롱 아파트 자리에서 고물상을 했었다. 원래 내가 남을 돕는 일을 참 좋아해서 그 때도 표창장을 두 장 받았었다.

 

전제선집사: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포 감옥소 앞에 한증막이 있었는데 감옥소에서 나오신 애국지사분들이 찜질이 목적이 아니라 푸대를 쓰고 울기 위해 한증막에 가는 일이 많았다. 그 때 만리동에서 아현동으로 넘어가는, 감옥소가 보이는 언덕에 만리교회가 있었는데 그 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얼마나 진실되고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믿음이 없어도 만리교회 가서 울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다른 건 몰라도 삼일운동 노래 하나만큼은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아마 그때쯤부터 아버지는 귀신이 싫어지신 듯 보였고 아버지가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부터 모시던 신주단지를 강에 던져버리셨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아버지께 “너 하늘이 무섭지 않노!” 하셨던 기억이 난다.

 

6.25 전쟁이 일어난 후로는 아버지, 어머니, 동생 둘과 함께 도둑질 빼고 돈 되는 건 다 했었다. 그리고 군인이 됐는데 처음 주일이 된 날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어서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전산악권사: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다가 지금 사는 낙하리로 이사를 했는데 수리해서 입주하기 전부터 삼성교회가 높으니까 십자가가 보여서 ‘저기 교회가 있구나, 거기 가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고 남편에게 교회에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성경을 읽고 써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우면서도 교회에 가기 싫단 생각이 안 들고 한 번 가기로 했으면 계속 가야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에게 “갑시다” 라고 했고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간 첫 날에는 둘이 교회 뒷자리에서 그렇게 눈물이 나서 계속 울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고 당시 유광웅 목사님이 계셨는데 우리를 잘 받아주셨다. 다 울고나니 창피한 마음과 함께 교회에 아는 사람도 없고 쓸쓸해서 냉랭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때 처음 말을 걸어주셨던 여자분이 홍장로님이시다. 그 후로도 반년이 지나도록 인사하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걸기에 쓸쓸하다고 했더니 남편이 이 지역은 북한과 가까워서 원래 분위기가 냉랭하고 우리가 교회를 사람보고 간 게 아니라 하나님보고 간 거니까 쓸쓸해하지 말라고 나를 타일렀다. 그래도 삭막하고 적막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남편이 고물을 줍다가 박스 속에서 예수님 사진을 발견해서 가져왔다. 그 때 어찌나 반갑고 좋던지 기쁜 마음으로 얼른 벽에 걸어놨었다.

 

시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신주단지를 모셨다. 결혼 후 집에서 굿을 한 적도 있었고 매월 초하루, 보름 때면 고기를 10근 가까이 삶아서 물 떠놓고 절을 하는 고사를 20년 가까이 지냈었다. 난 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차리기는 했어도 절대 절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시어머니가 몸이 아프시고 나서는 며느리가 절을 안 하고 하니 장군할아버지 모실 분이 없어서 어떻게 하냐고 걱정을 하셨다. 당시 대동굿을 하면 돈을 물 쓰듯 퍼부어야 했고 용하다는 무당은 통돼지머리에 삼지창을 끼고 그릇 위에 세워두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밤에 보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남편은 어머니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풍파가 일어나니 며느리는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이든지, 교회를 끊든지 해야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난 결혼하는데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고 하고 아들이 좋아하니까 교회 다니는 여자와 결혼을 시켰다. 그 후에 어머니가 이제 나는 나이도 들고 장군할아버지를 모실 사람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깨끗한 동해바다로 가고 싶어 하시니 바다에 갖다 모셔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너희는 교회를 가든지 절을 가든지 원하는대로 하라고 얘기하셨다. 그래서 먼저 남편과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동해바다로 현지답사를 갔다. 택시를 타고 묵호항으로 가서 배를 구했고, 며칠 뒤 짐을 싸들고 버스를 타고 동해로 향했다. 남편과 함께 물동이랑 삼지창 같은 것들을 안고 대관령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목이 졸려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산을 내려가면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다시 숨이 쉬어졌고 그대로 묵호항으로 가서 배를 탔다. 배를 타고 물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무거운 돌을 묶어 그것들을 다 던졌더니 물이 뱅글뱅글 도는 것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신주단지를 바다에 버리고 난 후에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된 것이다.

 

내가 사교적이고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서 처음 보는 사람이 접근하는 일이 잘 없는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도도 없이 혼자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교회에 나가게 됐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참 고맙고 감사하다. 그 마음은 뼛속깊이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이 류장로님, 홍장로님 같은 좋은 분 연결시켜주시고 함께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직접 경험한 일도 있다. 낙하리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됐을 때 자는데 그렇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이상하다 생각하고 넘기는데 삼일동안 계속 들렸고, 그 때 문득 예수 믿는 사람한테 귀신이 대들 때는 ‘ 예수의 피’ 라고 외치라는 얘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진짜로 ‘예수의 피, 예수의 피’ 라고 외쳤는데 그 때부터 바스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마귀가 덤볐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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