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삼성교회 안용기원로장로님 취재

 

나는 남들처럼 공부를 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7살에 감리교 권사이셨던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컸다. 한 가지 내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일본 순찰이 시시각각 감시했던 상황 하에서도 아버지께서는 예배를 인도하셨고, 어릴 적부터 그렇게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결혼의 전제조건으로 교회출석을 내거셨던 나의 외할아버지에 의해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으나, 물론 당시 교역자가 없었기도 했거니와 한문공부를 많이 하셨던 터라 예배를 인도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야학이 있었지만, 나는 제대로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나는 오히려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치기 시작했다. 새벽기도를 나가서 꼬박꼬박 5-6장을 읽었고, 이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21살적인 약 60년 전에 나는 해병대 30기로 입대를 했다. 당시 군대의 훈련은 질서가 없었고, 잔인하리만큼 혹독했었다. 지원체제가 아닌 전시 군인이 모자라 동원을 하는 식이었기에 3000명에 달하는 입대동기가 1개 여단으로 전부 금천으로 왔었다. 사단도 아니고 그땐 전투단이라 불렀고, 그 전투단이 점차 몸집을 불려 해병대가 창설되게 된다. 소금만 묻힌 주먹밥으로 끼니를 떼우고, 열차 아래 자갈밭에 팔꿈치를 까여 피가 날 때까지 훈련을 받았던 굶주리고 힘든 시기였다. 그렇게 훈련을 마치고 전방에 나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군목이 있던 터라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당시의 군대에서는 참으로 무섭고 참혹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는데, 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인사계의 해군 2기생의 일이다. 그는 내 고참으로 정말 무서운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그때만 해도 휴전상태였지만 권총을 차고 다녔고, 사병들이 아프다고 하면 되려 운동장 50바퀴를 뛰게 만들 정도로 온정이 없고 차가웠던 사람이었다. 실상 그 당시에 사병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야하는 일이 잦아 종종 설사병으로 고생하곤 했다. 당시 중대장이 제대할 무렵이었는데, 높은 자리의 분의 자제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약혼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서 몰래 미군 보급품 중대 차 2대를 남대문시장에 가서 팔아버렸다. 이를 알게 된 인사계는 중대장의 코를 물어뜯는 데에 이르렀다. 그 상태에서 그는 치료도 하지 못하게 했고, 급기야는 그를 총으로 쏴 죽인 뒤 당신도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나의 이모부께서는 일본에서 이발 기술을 익히셨던 분으로 나는 그분 밑에서 6년가량 이발 기술을 배웠다. 사회에서 이발 기술자로 일하다가 군에 들어온 이후 나는 해병대 포부대의 이발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모부께 어깨너머로 배웠던 손재주 덕에 나의 이발 기술은 인기가 좋았다. 나에게 이발을 받겠다고 연대본부에서 차를 보내어 종로에서 이발도구를 사다가 대대장의 이발을 하게 되기도 했다. 이발병으로 있었던 덕에 나는 훈련에서도 제해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덕을 많이 봤다. 그렇지만 당시는 계급이 올라가는 일이 흔치 않았고, 제대를 못하게 만들어 7~9년간이나 해병대에 머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나 역시도 의가사 제대를 했기에 6년 만에 제대를 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오랫동안 제대를 못하고 군에 있었을 것이다.

 

부대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동네에서 우종덕 목사와 장인 윤숙현집사와 장모 권기미권사와 함께 탄현교회로 나갔다. 군 복무 중 교회를 나가면서 이발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데, 그 이발하는 기술이 영 서툴러 내가 조금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이내 나의 이발 기술을 보고는 내가 제대할 때 머물러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 얼굴형에 맞추어 이발을 하는데다가 15분이면 이발을 완성해버리니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버스도 안다니는 그 먼 곳까지 사람들은 소 달구지를 끌고는 이발을 하러 왔었다.

 

그렇게 제대 후 이발소에서 일을 하면서 나의 생활은 차츰 안정되어가고, 문지리에 정착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던 그 이발소 하시던 분이 바로 나장로님으로 삼성교회 사택도 그분의 손재주로 군인들을 데려와 감독하고 지으셨다. 반 목수인 셈이었다. 물론 장로님은 탄현교회에 출석하셨으니 나와 교단은 달랐는데, 그 탄현교회는 대동교회에서 피란와서 세운 교회로 이를 포함하여 탄현 순복음교회, 한마음교회, 갈현교회, 그리고 삼성교회까지 모두 다 같은 교단에 해당하고 내가 제대할 당시, 즉 27살 때에는 갈현교회, 탄현교회, 삼성교회, 만우리교회, 오금리 순복음교회 등이 있었다.

 

나는 제대 말년부터 무료로 봉사하기 시작했지. 무료로 이발을 해주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고 점차 동네에서 나는 발도 넓어지고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우종덕 목사가 어린 시절인데, 그는 참 어렵게 살았다. 경찰로 근무하다 전사당한 형 아래서 어렵게 살았던 위인이었다. 물론 나 역시도 넉넉하게 살았던 처지는 아니었지만, 동네 주민들이 돈이 없으니 이발을 해주는 대신에 벼 서말(쌀 1말 반가량)을 내게 주었으니 실상 먹을 걱정은 없이 살았다. 그 덕인지, 우리집은 군서기며 누구며 마치 식당인양 늘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내 아내인 윤권사가 그 당시 정성스레 음식을 마련하는 등 고생이 참 많았다.

 

마찬가지로 나장로님 역시도 이발소 운영을 통해 자제분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셨다. 큰 아들은 은행장을 하다가 은퇴해서 장로로 섬기고 있고 딸은 서독에 간호학교 나와서 국제결혼해서 살고, 나머지 딸 두 딸은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알고 있다. 어찌되었건 나는 제대 후 그렇게 55년을 탄현면에서 정착하였으니 이제 내게는 이곳이 고향이나 다름없다. 이발소 역시도 40년을 넘게 운영했으니 대부분의 동네 주민들이 내게서 머리를 잘랐고,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모르는 게 없을 정도다.

 

우종덕 목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 있다. 나는 28의 나이에 첫 아들을 갖게 되었는데, 아이가 밤중에 내도록 우는데 아이를 달래 줄 아내가 집에 없는 것이다. 30분가량 아기가 울어대니 내가 열이 받았던 모양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아내를 보자마자 따귀를 때려버렸다. 사실 그날 나의 아내는 사정이 좋지 않은 우종덕 목사집에 쌀을 퍼주러 갔던 것이었다. 당시 후회가 많이 남아서 그 이후로는 부부 싸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떤 일이 되었건 내가 잘못하고 진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아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있는데, 내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선을 통해서였다. 제대 후 생활이 안정되면서 여기저기서 선 자리가 많이 들어왔는데, 그런 내가 “굶지 않고 살 정도”는 된다고 보였는지 대략 9명 정도를 소개받았고 게 중에 아내가 있었다. 사진 한 장 없이 결혼했지만, 아내는 늘상 내 곁에서 묵묵히 내조를 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당시는 부흥회를 참 많이 했었는데, 그 때마다 재래식 가마솥에 밥을 한가득 지어서 초롱불을 켜놓고 예배를 드리고 아내가 정성들인 밥을 함께 나누어 먹곤 했다. 살갑게 잘 챙기고 불평이 없던 아내였다.

 

그 당시의 교회는 시골교회이다 보니 ‘못자리’라 부르는 게 가장 적절했다. 교회에 정착하여 섬길 수 있는 일꾼이 그리 많이 없었다. 특히나 처녀들은 결혼을 하면 다른 동네로 가기가 부지기수라 교회를 떠나는 일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가마니를 깔고 멍석을 깔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송판을 만들어 상으로 사용하여 초롱불 켜놓고 예배를 드렸으니 지금과 같은 교회만 보아오는 청년들에게는 생소한 광경일 것이다. 하지만 내겐 당시의 신앙생활이 참 재미있었다. 나는 교회에서는 주일학교를 맡아 아이들을 인도하고 데리고 다니며 섬겼었다. 내가 군인이다 보니 교회 밖에서도 나를 ‘안선생’이라 부르긴 했지만, 내가 선생으로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면서 당시 순진하고 말도 잘 듣던 그 아이들 덕에 즐겁게 섬길 수 있었다.

 

이세용 목사는 신앙전통을 언급하며 이를 물려줘야한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이세용 목사가 시무를 하던 때에 군인가족이 갑자기 마귀에 들린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집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이세용 목사 이전부터 교회에는 군인들이 많이 나왔었다. 군인가족이 살던 집 주인이 세수를 하면서 금반지를 빼놓았는데, 이것이 없어졌다며 군인가족을 의심하는 것이 사건의 시발이 되었다. 어찌 될까 겁이 났던 그 가족은 누명을 쓰고도 달아났던 모양이었다. 그 가족을 어떻게 붙들었는데, 그 부인이 스트레스로 쓰러졌다고 나를 불러서 찾아가보니 그가 귀신에 들린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부인을 붙잡고 찬송을 부르고 계속 기도했는데, 거짓말처럼 귀신이 물러났다. 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정말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예배를 주로 가정집에서 드렸는데, 우종덕 목사가 전도사시절에 나는 그를 대동교회로 데리고 갔다. 가정예배에서는 교역자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없으니 교역자의 설교를 듣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종덕 목사도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그는 머리가 좋았고 통신공부를 많이 했다. 그의 목사 안수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박은교 목사였는데, 그는 군종출신 제주도 사람으로 우씨네 딸과 혼인을 맺으면서 우종덕 목사를 제주도로 이끌게 된다. 그렇게 제주도에서 목회생활을 하다가 특별히 강의를 받아 목사고시를 볼 수 있는 케이스를 찾게 되어, 그 덕에 우종덕, 당시 전도사는 1주일에 1번 정도 박은교 목사와 비행기를 타고 와서 강의를 듣고 결국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우종덕 목사의 중매를 내가 했는데, 그 처의 할머니인 이신애 권사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바가 있어 우종덕 목사를 소개하게 됐다. 이 권사님은 내게 애정이 많으셔서 종종 나를 불러 기도를 부탁하시곤 했고, 돌아가실 때에도 나는 그 자리를 지켰다.

교회를 지을 즈음에는 김의종 목사가 시무를 했었다. 그는 현재 승산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교회 건축에 관해서는 나에게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에피소드들이 몇몇 있다. 당시 물매를 잘못 세워 비가 새게 되었는데, 이를 서울의 염산교회에서 지원을 받아 고치는 일을 나를 포함하여 교인들이 힘써 해결했었다. 지금 교회의 종 역시도 당시 염산교회에서 지원을 받은 것이다. 그 외에도 목재를 사서 블록을 지어야 하는데,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을 다들 두려워하여 내가 직접 올라가 작업을 했다. 그때도 내가 집사로 섬기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김의종 목사는 전도사적부터 삼성교회에서 섬겨서 목사안수까지 받았고, 교회설계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이 김목사의 시무기간에 이루어졌었다.

 

한번은 김목사가 새벽기도 때문에 의정부에서 이까지 온다고 하기에 눈도 오고 길이 위험하니 내가 인도를 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서로 상부상조를 하며 교회를 잘 꾸리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연 그가 “하나님의 뜻”이라며 교회를 떠나겠다며 후임 목사를 구해달라고 내게 전했다. 당황한 나는 교회의 사역 있는데 교회 나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교회도 짓고 애썼는데 왜 나가려하냐며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완고하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고, 하는 수 없이 류광열 장로, 당시 집사로 섬기던 그와 함께 구파발에 있는 임종헌 목사를 찾아가게 된다. 종종 부흥회를 인도하던 목사기에 후임 목사를 소개해달라는 심산으로 찾아간 것 이었다. 그렇게 후임 목사를 소개받고 새 목사로 부임하겠다고 약속을 해놓은 상태에서 김목사가 갑자기 교회를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쓰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재직회 때 “안장로 죽어서 염해서 장사 지낸 뒤에 교회를 나가겠다.”는 망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 일 이후로 김 목사는 나와 싸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에 순종해야함을 잊지 않았던 나는 그가 의정부로 심방을 가자고 할 때에도 군말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심지어 의정부의 그 형제는 교회를 떠난 형제였음에도 별다른 이야기를 붙이지 않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김 목사는 내게 교회 빚이 있는데 소 팔고 목장을 시작하던 내게 소 팔고 집 팔았으면 교회 빚을 갚지 않고 뭐하냐는 식의 실언을 하게 된다. 그때 나는 너무 쇼크를 받아서 이후로 점점 몸이 안 좋아졌는데, 증상이 심해져서 검사를 받은 후 대장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대장암 판정을 받은 때가 1999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대장의 4군데에 암세포가 살아있다고 의사는 내게 전했고, 이를 완전히 다 없애려면 대장을 다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살아야하니 어쩔 수 없이 대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고 잘라낸 부분을 소장하고 연결해 소장을 넓히는 수술까지 했다. 수술 이후 밥을 먹고 평소처럼 지냈는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주일날 아침에 동네의 풀을 깎으러 나오라고 하여 교회 사람들과 함께 풀을 깎은 후 아픈 배를 부여잡고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이튿날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장이 파열되어 수술한 부위가 풀렸다며 서울의 큰 병원을 가라고 의사는 내게 전했다. 그리하여 서울대병원에 갔더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응급처치만 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그 뒤에 24시간의 수술을 한 후 1주일을 물이 빠지도록 한 후 다시 수술을 했는데, 그 때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의사는 가망이 없을 것이라며 장사를 지낼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나의 아내는 내가 강하니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며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한다. 그렇게 죽은 채로 2.5일을 보낸 후 목 아래 가슴부터 점차 회복이 되어 나는 기적같이 살아나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 나는 일을 정식으로 하지 못하고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주머니의 소독과 세척 탓에 어딘가 멀리 이동할 수도 없다. 그리고 땅바닥에 앉기도 불편하다. 하지만 의사가 죽을 것이라 확신했던 내가 그 이후 어언 13년을 더 살아왔다. 당시 고생했던 내 해병대 친구들은 지금 다 죽고 없다. 골병이 들어 죽는다고 우린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평안하게 살고 있다.

 

내가 그렇게 살고 나니 내 아내인 윤권사도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내시경 받고 병원을 다녀도 진단이 나오질 않았고, 그녀는 끊임없이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백병원에서 한 달을 입원했는데도 진단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내가 의사를 잡고 물었더니 그녀의 병이 특이해서 카메라로 장자 밖에서 4군데를 찢어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암세포들이 창자 사이의 장 사이로 개구리가 알을 까놓듯이 그런 식으로 가득히 살아있었던 것이다. 의사는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할 요량으로 대수술을 받을 때 들어와서 확인하게까지 했다. 암세포를 모두 없애려면 소장과 대장을 모두 덜어내야 해서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조금 덜어낸 후 항암제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내는 항암제를 맞고 복수의 물을 빼내는 일을 7년간 반복했다. 병상에서 그녀는 지쳤고, 나 역시도 만만찮게 들어가는 항암제 비용과 주일에 쓰는 간병인 비용에 버거웠지만, 그렇게라도 오래 버틴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창자 밖의 악성암에도 불구하고 7년이나 버텼고 그렇게 편안하게 아내는 아침 9시 45분에 소천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바로 그날 동네의 홍대병 부인에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날이 금천 장날이었다. 그 부인이 버스를 타고 장에 나가다가 꿈인지 생시인지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내 아내를 싸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교회를 다니지 않던 절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도 마침 아내가 소천한 9시 45분에 그러한 환상을 본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남편과 함께 김의종 목사가 있는 승산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 부인이 그 이후 꿈을 꿨는데, 집에 있던 중이 “여기서 더 이상 못살겠다.”고 하며 침대 밑에서 배낭을 메고 나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아내 윤권사가 죽으면서까지 한 생명을 구했구나 생각하며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했다. 따뜻하고 정이 많은 아내가 소천한지 벌써 3년이 되었지만 나는 그의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애틋한 마음은 아직도 여전하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