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복음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21세기 최고의 소책자!!!)
이 책을 감히 21세기 최고의 소책자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아의 문제'에 대한 복음적인 답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님은 참으로 이 시대가 주목할 만한 목회자이자 선생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수를 현대인에게 적절하게 그러나 전혀 복음의 희석시키거나 혼란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자기 망각의 자유)이다. 현대의 질병의 핵심은 너무나도 자기를 의식하고,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고, 공허하고, 분주한 자아에 있다. 이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서 자존심의 문제를 철학적, 심리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자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자아를 의식하지 않는 길이다. 물론 불교나 도교에서 무아(내가 없음), 초아(초월적 자아) 등을 일찍부터 말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현실의 삶을 떠나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지고 않고도 어떻게 자아를 초월하며, 자아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고전적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핵심을 교만(hybris)로 보았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문제의 핵심을 '낮은 자존감'으로 보고 있다. 과거에는 자아가 너무 교만해서 문제라고 했다면, 현대는 자아가 너무 자존감이 낮아서 문제라고 정반대의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다. 저자는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서 4장 7절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교만하지 말고, 자기 자랑하지 말라."(No pride, no boasting).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분쟁의 상황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칭찬을 의식하지 않으며, 심지어 나 자신도 나에 대하여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새로운 자아 이해를 가지게 되었을까?
저자는 흥미롭게도 자아에 대하여 이렇게 진단한다. 발이 아프지 않다면, 길을 걸을 때에 발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걸을 때에 발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발이 아프다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이 자아에 자꾸 신겅을 쓴다는 것은 '자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자아는 어떤 문제를 가졌는가? 네 가지 문제가 있다.
1. 자아는 공허하다.
2. 자아는 고통스럽다. 마치 빵빵하게 늘어난 풍선처럼, 빵빵하게 불어난 배처럼 고통스럽고 불편하다.
3. 자아는 점차로 분주하고 바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주목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아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비교하는 가운데 우쭐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한다.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을 오가는데 이 두 가지는 한 형제이다.
4. 마지막으로, 자아는 상처받기 쉽다. 풍성이 빵빵하게 커져 있으면 터지기 쉽상이듯이, 교만과 우월을 오가는 풍선과 같은 자아는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이처럼 자아는 empty, painful, busy, and fragile하다. 공허하고, 고통스럽고, 공허를 채우기에 분주하고, 상처받기 쉽다.
저자는 해답으로 새로운 차원의 해답을 제시한다. 복음적 겸손이다. 자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며, 주님의 판결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을 의식하고,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을 재판장에 서는 것으로 비유한다. 우리는 날마다 수없이 자신을 재판장에 세운다: 사람들의 비판과 칭찬, 자기 자신의 성찰과 고민 등. 그러나 저자는 복음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누리는 <무죄 선언>이다. (무죄선언은 로마서의 주제이다.)
복음적인 겸손(gospel-humility)은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또는 겸손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적인 겸손은 자기 자신을 생각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바라보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자기 망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자존감이 높은지 낮은지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마치 발이 건강한 사람은 걸을 때에 발을 의식하지 않듯이, 복음안에서 변화된 자아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판에 괴로워하지 않고, 자아가 상처받지 않고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도 어떻게 놀라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는가? 무신론자, 불교도, 이슬람교는 선행이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판결하게 한다. 그러나 복음은 무죄선언이 그 사람을 새로운 삶으로 이끈다. In Christianity, the verdict leads to performance. It is not the performance that leads to the verdict.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막1:11) 하는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난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생각하시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