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고통의 문제>는 놀랍게도 뚜껑을 열어보니, 신정론을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모두를 구원하지 못하는가?
C.S. 루이스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신학적 논쟁을 원치 않아서 정통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본인의 잘못임을 인정하다. 자유의지는 설명이 쉽지 않으며, 창조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창조설화로 본다. 신화란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루이스를 좋아하면서도 이런 면에서 의아해 한다. 나는 루이스의 진솔한 이성적 추론을 재미있기게 읽는다. 루이스는 놀랍게도 개혁교회의 핵심 교리인 전적 타락에 대하여 루이스는 별로 공감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어떻게 믿음의 접촉점이 있느냐 하고 반문한다.
창조와 타락, 자유의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다.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의지에는 악의 잠재성이 있다. 그러나 악이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제2의 선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쳐지고, 하나님의 주권은 약화될 소지가 있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고통이 유래함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설명하는 부분이 탁월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한다.자기 자신이어서가 아니라 선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더 좋은 선이 있었다면, 자신을 포기하고 그것을 사랑했을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다. 다른 최고의 선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고 그 선을 추구했을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을 얻는 길이다. 씨앗도 살기 위해서 먼저 죽어야 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인간의 타락과 함께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다룬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 <우리가 얼굴을 알 때까지> 등에서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다루는데,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이해를 정리하면 흥미로울 것 같다. 이미 누군가가 그 작업을 해 놓았다. <천국 상상하기: C.S.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규원, 웨인 마틴데일) "지옥의 문은 안에서 잠겨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이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즐기고, 지옥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죄인은 천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은 돌이키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한다. 아니 스스로 저들은 심판의 길을 택한다. 이 문제는 <지옥과 천국의 이혼>에서도 나타난다. 이 인용문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루이스는 영문학자다. 신화에 전통하다. 그는 어거스틴의 원죄론, 아벨라르의 대속의 만족설이나 보상설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짐짓 소신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매력이 있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진술에 있어서, 먼 조상의 죄에 대한 책임으로 심판받는다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고통의 문제>는 내 예상과는 달리, 단순히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신론, 인간론, 구원론, 그리고 지옥과 천국 등의 주제를 변증적으로 다루는 평신도 신학서적이다. 신학, 영문학, 신화학에 정통한 평신도 신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주제가 흥미롭지만, 무겁고 논리적이어서 따라가기 힘들어서 다시 꼭 읽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