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의 화두는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좋은 질문은 좋은 생각을 낳고, 좋은 생각은 좋은 동기를 낳고, 좋은 동기는 좋은 행동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 다녀온 아이에게 "너 오늘도 싸웠니?"라고 질문하면,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너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니?"라는 질문을 하면, 이 질문은 그 아이에게 전혀 다른 생각과 감정을 불어넣는다. 나의 인생에 통찰을 얻게 된 것은 좋은 질문을 받았을 때이다. 좋은 질문은 통찰을 주고 영감을 주고, 내 인격과 삶을 바꾸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도 좋은 질문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내담자에게 어떤 질문을 했을 때, 그 미국 친구가 "난 한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그 질문 처음 받아보는데." 하며 신기해하고 새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를 보았다. 첫 번째로 하는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잡으로 간 베드로를 찾아가, 조반을 함께 먹고서 베드로와 단 둘이 대화를 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하셨다. 세 번이나 하셨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회복시켜주시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왜 이 질문을 하셨을까?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진정한 자존감은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능력과 열매는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18명의 피택자가 5월 31일 임직을 받는다. 피택자 교육을 마치고 수료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모두들 느끼는 느낌은 '난 자격이 없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등 그 초점이 자기의 능력, 자기의 자세, 자기의 상태에 맞추어져 있다.
만일,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하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무슨 말을 했을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죽을 죄인입니다. 저를 꾸짖어주세요' 등 등... 자책하며,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입술로 변명이나 자책이나 다른 얘기를 하기보다도 사랑의 고백을 하게 하셨다. 아니 그 사랑의 고백을 일부러 시켜서라도 받기를 원하셨다.
미천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우리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아서 주님께서 무슨 유익이 있으신가?
그런데도 주님은 미천한 우리의 사랑의 고백을 받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의 고백에서 진정한 자존감이 형성되고 평안과 능력이 나온다.
만일,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고, 모든 빨래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 학교 공부를 뒷바라지 하고, 낮에는 일터에 나가 일하는 그런 직장이 있다면, 아무도 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어마 어마한 일 들을 하지 않는가?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능력이 나오고, 감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요리할 수 있어? 언제든 부르면 달라가고 심부름할 수 있어? 여행안내할 수 있어? 예절 교육 시킬 수 있어? 세탁할 수 있어? 등 자녀 교육이나 가정 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냐고 물으면 몇이나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여, 일하고 모든 가사 일도 감당하고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교회를 섬기는 일은 <주님을 사랑하면> 감당할 수 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한 번도 해보 않은 일도, 부끄러운 일도, 자신 없는 일도 다 할 수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초점을 나와 내 능력과 내 상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맞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다. 가지의 역할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가지의 역할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 우리 성도의 역할은 예수님의 사랑의 진액을 빨아 먹는 가지이다. 붙어 있으면 자연히 열매를 맺게 된다. 이게 열매맺는 원리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 주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아니라, 독립적이 나무가 되어서 자기가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주님을 간 곳 없고, 자기 의와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며 교회를 어지럽힌다. 신자의 할 일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사랑의 고백을 세 번씩이나 하게 하신 다음에, 오순절날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신자의 사랑의 고백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열매맺고 충성된 일꾼의 비결이다.
사랑하는 피택자들이여, 변명하지 말라. 자기 얘기 하지 말라. 자격지심에 빠지지도, 비교의식에 빠지지도 말라.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 고백을 주님은 듣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 사람은 권력을 사랑한다. (Love of Power)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능력(Power of Love)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힘으로 강요하고 윽박지를 수는 있으나 영혼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다.
오직 사랑의 길, 십자가의 길만이 영혼을 거듭나게 한다.
이 사랑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요21:19,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