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선택받은 자의 행복과 능력>
박지성과 히딩크를 예로 들자. "능력있어서 선택했다기보다 선택하니까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나의 어떤 점이 사랑스러워서 날 선택했어?" 묻자 이 질문에 "당신의 어디가 사랑스러워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선택하고 나니까 당신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졌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선택은 사람을 존귀하고 능력있고 충만하고 가치있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답게 감사하며, 사랑하며, 용서하며,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고 계십니까? /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택에 책임을 지십니다. 책임지고 우리를 사랑받을만한 존재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시겠다고 결심하시고 작정하셨습니다. 빨리 순종하시고 항복하세요.
본문접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하여 반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최총 목표는 온 인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넘어서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골이 나고 말았습니다. 왜 나만 사랑해야지, 다른 아이들까지 사랑하느냐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 그만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까지 사도바울을 통해서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인 자기들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하게 잘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더 확장하는데 있지, 사람을 심판하거나 징계하는 것을 즐기는 폭군의 주권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징계나 구원의 동기는 사랑이요, 구원입니다.
문제제기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문제
그러면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렸다면, 인간이 무슨 책임입니까? 왜 인간을 책망하고 심판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심판하시니 왜 그렇습니까?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으니 인간은 자유도 없고 책임도 없는 것 아닙니까? 반문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도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의 신학교에서 토론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하여 반박하여 말합니다. "주권적 선택은 잘못된 사상이다.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자체 모순이 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선택에 대한 오해
여기서 우리는 주권적 선택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다루고 넘어가야겠습니다.
1.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느냐?는 반론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구원은 결정론이나 숙명론이나 운명론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욱 인간은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망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이기심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3가지 자유라고 할 수 있지요.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자유하도록 구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있어서 영국의 설교가 스펄전은, 주권적 선택과 인간의 자유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친구와 조화를 이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예) , 고전7:39,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결혼 선택권의 자유!
2. 하나님이 불의한 것 아니냐?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만, 어떤 사람은 버리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버린다기 보다는 믿지 않은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믿음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지만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죄인으로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그 어떤 책임이나 의무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 비유를 살펴봐야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불의한지를 생각해봅시다. 포도원 주인이 사람을 선택합니다. 새벽 6시에 일찍 선택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9시에 선택하여 일을 합니다. 아주 정상적인 일꾼이지요.(소위 선민이다.) 그런데 주인이 나와보니 점심때가 되도 시장에서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에게 품꾼을 약속하고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후 3시,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5시에도 시장에서 노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놀고 싶어서 노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써줄 사람이 없어요. 자격미달이예요, 아무도 인정해주고 선택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불러다 썼습니다. 이제 일당을 주는데,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약속한 일당을 줍니다. 약속한 일당이 우리돈 10만원이라고 합시다. 마지막에 온 사람 10만원을 주자, 저마다 다 기대가 생겼습니다. '나는 일 더 많이 했으니 더 주겠지.' 모두 주인의 선하심과 선택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공로와 자기 땀흘린 것만 생각합니다. 행위중심이요 자기 중심적인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중심입니다.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그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자기생각만하고 일한 것만 생각하니, 똑같이 10만원을 주니 화가 납니다. 그중에서 누가 제일 화가 났겠습니까? 아침 6시에 와서 일한 사람이죠. 이 사람이 누구냐? 이스라엘 선민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교회에서 제일 많이 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감사가 아니라 불평이 있어요. 자기가 받은 은혜는 생각안하고 자기가 한 일만 생각하니 화가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불의하다'고 따집니다. 주인이 말씀합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자가 나중되리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주인의 주권적 선택의 은총을 잊어버린 사람은 버림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떨어뜨린 것입니까? 자기 불평과 원망과 주인에 대한 오해와 불신앙이 자기를 지옥으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하나님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것은 자기자신입니다.
3. 하나님이 독재자가 아니냐? 이것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지금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그런 분을 독재자다, 폭꾼이다라고 몰아부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사람은 이 세상에서 동물적인 욕구를 위해서 살아가지만 그것으로 인간의 영혼은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배를 통해서 교통해야 영혼이 삽니다. (예화) 톨스토이 <고백록> 그는 아내와 가족과 단란하게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울증이 빠졌습니다.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가 동물적인 욕구를 즐기려는 삶만을 살았습니다. 좀 더 편하고 좀 더 잘 먹고 좀 더 세상에서 즐거운 삶만을 살았지, 자기 속사람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에 빌자면, 그 전에는 자기에게 영감을 주던 일몰의 아름다움도 이젠 아무런 영감을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의 친밀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고 별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삶의 즐거움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행복의 감정이란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난다. "이런 절대적이고 영원한 이런 종류의 행복은 종교 이외 어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윌리엄 제임스, <종교체험의 다양성>) 1. "더 높은 행복은 더 낮은 불행을 제어한다." 자기 희생, 굴복이 즐겁다. 2. 고난과 역경이 두렵지 않다. 도피하고 싶지 않고, 이미 다른 차원에서(영적인 차원) 그것들을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자는 고난을 이깁니다.
그 동안 똑똑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을 영혼으로 만나고 보니, 거기에 '새로운 차원의 힘'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편안한 삶이 아니라 농부의 단순하고 땀흘리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머리로 신앙생활하려고 하지 말고, 가슴으로 하나님을 만나세요. 똑똑한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세요. 지금 하나님은 내 앞에, 내 옆에, 내 안에, 내 위에, 나와 함께 하세요. (하나님의 존재에 감정을 집중했을 때, "삶에 대한 기쁜 소망"이 내 안에 일어났다.) 머리로만 삶을 이해하려는 지식층사회 멤버에서 탈퇴하여 시골로 갔다.
전환: 따라서 1. 절대주권은 인간의 행동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숙명론, 결정론, 운명론은 잘못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불의하다는 반론도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불의를 반증할 뿐입니다. 3. 하나님은 독재자라는 비판도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선택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5-26절을 읽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므로 저 사람은 구제불능이야,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호세아의 이야기를 보세요.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고 하시고, 사랑받지 못할 자를 사랑받을 자라고 말씀하시며,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절대주권적 선택의 목적은 징계나 파멸이 아니라 사랑이요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동기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십시오. 쓸모없고 아무도 써주지 않아서 빈둥거리고 있는 그 자를 불러다 하시고 품삯도 하루 일한 것만큼 주었어요. 그 마지막에 불러온 사람이 바로 나가 아닙니까? 그런데 자격없고, 공로없는 자를 불렀는데 왜 불평과 원망이 그리도 많습니까?
2. 둘째, 주권적 선택은 구원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결코 방심할 수 없게 만듭니다. 27-2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공로, 자기 가문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십시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이것을 바로 깨달은 자는 고백합니다. "나는 무자격자입니다. 나는 긍휼을 입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결론. 토기장이와 진흙
하나님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무한과 유한은 무한한 틈새가 있습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들려온 하늘의 음성을 여러분의 영혼으로 날마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임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존재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 더 자유하게 됩니다. 더 충만하게 됩니다.
2.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라.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 우리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빗으시는 하나님께 전폭 자신의 인생과 가정을 맡기고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