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최고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착한 사람, 괜찮은 사람(nice person)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사람(new person)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였다. 착하고 선한 사람은 많은 철학과 종교들이 추구하는 인간상이다. 예수 믿는 것이 그저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자신의 노력과 공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율법적인 접근이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은 우리를 그저 착한 사람 정도로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와 신분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준다. 이러한 존재의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종교와 철학들은 많이 있겠으나,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외에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며, 복음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바이다.
복음을 듣기 전에 우리는 나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실존이 '죄인'이라는 영적인 진단이다.(롬3:23) 착한 사람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이 철저히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개혁신학의 표현에 Being good can be a greater barrier to God than being bad.(착하고 선한 것이 나쁜 것보다 도리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15)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착하게 열심히 살아온 맏아들이다. 반면,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그 은혜를 깨닫게 된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마20장)에서도 제일 일찍 와서 일한 종은 주인의 선하심에 대하여 불만을 품다가 도리어 형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왜 착한 사람은 이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불행한 인생으로 전락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느니라."(롬5:21)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영적인 파산선고를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된다.
성경속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허물과 과오가 컸다. 베드로가 그랬고, 의심맏은 도마가 그랬고,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며 예수님을 폄하했던 나다나엘이 그랬다. (요21:2절의 순서는 초대교회의 지도력의 순서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