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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럴드 웨스트팔 저, 이명곤 역《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 서평자: 윤덕영

 

 

기독교 세계에 기독교 새로 소개하기

 

키르케고르는 파토스를 철학의 주제로 부각시킨 현대 철학의 선구자이다. 진리는 앎이 아니라 삶이며, 지식이 아니라 양식이다. 철학의 주제를 로고스에서 파토스로 전환시켰다. 당시에 철학은 위기를 맞았고 형이상학은 종언을 고했다. 철학이 삶을 해석하고 풍요롭게 하는데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했다. 철학은 사변적 논리체계로 흘렀다. “논리의 체계는 있어도 실존의 체계는 있을 수 없다”는 키르케고르의 말이 실존주의의 시작이었다.

 

삶은 앎보다 앞선다. 삶은 이론보다 더 크다. 키르케고르는 루터파 신학자로서 믿음과 행함, 은혜와 삶의 문제를 주제로 다룬다. 칭의의 구원은 신앙의 출발점이지 종착역이 아니다. 루터와는 달리 키르케고르는 성경가운데 야고보서를 가장 사랑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보서 2장 18절).'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린도전서 8장 1절). 기독교 실존주의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데 머물지 않고, 따름의 대상으로 삼는다. 본회퍼가 키르케고르 사상을 이어받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고난의 길과 정의의 길을 선택했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고난과 자기부인을 겪는 것인데, 명목상의 기독교에서는 고난과 자기부인이 필요치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고난이 없다고 말하는 번영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모든 저술은 참된 인간이 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웨스트팔이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키르케고르는 처음부터 기독교적 관점을 가진 사상가이다. 초기에 심미적 작품을 썼다가 후기에 종교적인 저술을 쓴 것이 아니다. 《저자로서 나의 관점》에서 키르케고르가 분명히 밝혔다. "나는 처음부터 종교적 작가였고, 내 모든 저술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키르케고르는 '현대철학의 선구자' '실존주의의 아버지''기독교 사상가'이다. 이 책은 기독교 사상가의 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조망한다.

 

최근 출판계는 그를 그리스도교 사상가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 홍성사에서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토니 킴 저)과《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을 출간했고, 샘솟는 기쁨사에서 《스스로 판단하라》(2017년),《자기 시험을 위하여》(2018년), 《고난의 복음》(예정)을 출간하였거나 출간할 예정이다. 키르케고르를 난해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교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 표현들은 무릎을 치게 한다. 쉽고 감동적이며 영감을 불어넣어준다.

 

이 책의 저자 메럴드 웨스트팔은 현재 79세로 예일대와 뉴욕의 포드햄대의 교수를 지냈다. 그가 74세에《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을 썼다. 원숙한 키르케고르 원로학자로서 키르케고르의 사상의 핵심을 조망해 주었다.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에서 젊은 학자 토니 킴은 키르케고르의 《철학의 부스러기》에 나타난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웨스트팔은 《신앙의 합리성》에서 키르케고르의 가명 저자 3명이 쓴 5권의 유명하고 많이 읽히는 저술들을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꿰뚫어서 조망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섯 권의 저술은 《공포와 전율》(1843), 《철학의 부스러기》(1844)와 《철학의 부스러기의 결론적 비학문적 후서》(1846),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병》(1849)과 《그리스도교 훈련》(1843)이다. 키르케고르의 작품들을 심도 있으면서도 ‘믿음’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탁월성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고 꿰어야 보배'라고 말이 절로 떠오른다.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 믿음의 본질을 파악한 비기독교인

 

《공포와 전율》(1843)은 창세기 22장과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는 내용을 다루면서, 믿음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다. 딸을 죽인 입다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그리스의 아가멤논 왕의 경우와 아브라함의 경우가 어떻게 다른 지를 제시하였다. 《공포와 전율》도덕과 종교의 본질적 차이를 논증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은 결코 편안하게 하니라 끊임없는 내적인 싸움이다.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결코 지루하거나 무료하지 않다. 왜냐하면 믿음은 평생의 과업이지 결코 이 땅에서 완성되는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생활이 무료하고 지루하고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거나 진리에 대한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믿음에 들어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성령의 불씨가 없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희열과 경탄(wonder)을 강조한다. 문제는 객관적인 정보, 완성된 교리에 머물러서는 이러한 희열과 경탄이 있을 수 없다.

 

《공포와 전율》에 나타난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다섯 가지를 저자는 말한다. 믿음은 평생의 과업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 신뢰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다. 믿음은 이성의 목적론적 중지이다. 믿음은 최고의 정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보라. 믿음은 결코 냉랭하고 차분한 감정이 아니라, 진리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self-denial)하고 자기를 체념(resignation)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택하는 끊임없는 이중운동이다. 믿음의 본질은 역동적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헌신과 정열이며 결단이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비기독교인이 이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간파한 젊고 논쟁적인 철학도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철학의 부스러기》(1844)와 《철학의 부스러기의 결론적 비학문적 후서》(1846, 역자 이명곤은 《결론적 해설》이라고 표기함)에서 '진리는 주체성이다!'라는 주제를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방법으로 다루었다. 주체성은 주관주의와 다르다. 주관주의는 객관성을 무시하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소피스트의 궤변철학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주체성은 인격주의에 가깝다. 하나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의 주체이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객관적 정보를 배우고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로는 안 되고, 믿음의 주체적 결단을 통하여 내 생애를 전부 바치는 헌신이며 신뢰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상이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경구를 사용하여 철학자들을 비판한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야, 이 바보들아!'라고 외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내면성의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면, 기독교는 계시성의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절대 역대 역설인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든지, 실족(offense)하든지 모든 인간은 갈림길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쇠파리'이었듯이,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의 명목상의 국가 기독교를 괴롭히는 '코펜하겐의 쇠파리'를 자처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상기설(recollection theory)이나 산파술로 대변되는 이성과 계시에 대한 믿음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논증했다. 철학과 믿음은 환원불가능한 차이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일체의 범신론(동일철학)을 배제하고, 절대 역설(성육신)의 계시(차이철학)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이다. 키르케고르는 성육신을 기독교의 본질을 바라보는 핵심으로 삼고 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의 두 작품에서 말하는 믿음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소개한다. 믿음은 계시의 수용이다. 믿음은 죄를 넘어서는 행복한 정열이다. 믿음은 객관적인 불확실성에 대한 열정적 수용이다. 믿음은 도약과 분투이다. 믿음은 이성에 대항하는 파토스적 노력이다.

 

 

안티 클리마쿠스, 높은 영적 수준을 가진 이상적인 기독교인.

 

앞의 두 저자가 간접적이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논증했다면, 안티 클리마쿠스는 직접적으로 수준 높은 기독교를 제시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1849)과 《그리스도교 훈련》(1850)는 가장 직접적으로 믿음의 본질을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외과의사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밝힌다. 단순히 약을 먹고 파스만 붙이는 식이 아니라, 그 당시의 기독교는 수술이 필요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복음이다. 왜냐하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믿음을 통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된다. 이것이 절망의 변증법이다. 절망은 단순히 우울이나 낙담과는 다르다. 절망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죽는다고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은 지독한 병이다. 이 절망의 치유는 믿음밖에 없다. 따라서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절망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하나님을 '자아를 확립하는 힘'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과 바른 관계를 맺고, 타인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키르케고르는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절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믿어야 한다. "너는 죄의 사함을 믿어야 한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훈련》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이룬다. 역사적 정보로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절대 역설인 성육신의 계시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와 동시대성을 이룬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고, 2000년 후의 우리라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동시대성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은 예수에 대하여 똑같은 거리에 있다." "동시대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 말은 '동시대성'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마태복음 11장 6절을 다루면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비천함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초대는 안락한 생활로의 초대가 아니다. 진리를 따르고 좁은 길로 가는 초대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불편한 삶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키르케고르는 십자가의 신학, 고난의 복음이 기독교의 본질로 본다. 번영의 신학, 성공의 신학, 영광의 신학은 고난을 왜곡하고 현세적이 차원에 머무르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신학의 모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지만, 번영의 신학은 "불가능은 없다"라고 신념처럼 외치게 한다. 《그리스도교 훈련》에서 실족의 가능성, 전투하는 교회 등이 중요한 주제이다.

 

 

나오는 말

 

키르케고르의 대가답게 메럴드 웨스트팔은 그의 말년에 키르케고르의 다섯 권의 책을 통하여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을 규명하며 믿음의 역동성과 믿음의 정열을 우리에게 선물로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이 설교와 신앙서적처럼 은혜가 되는 서적은 아니다. 어렵고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를 어렵게 만드는 게 키르케고르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제도적 기독교가 하나님의 믿음과 은혜를 너무나도 값싸고 천박한 것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기독교를 어렵게 만든 것은 철학자들을 향한 하나의 위트요 유머이다. 신앙의 세계가 철학의 세계보다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철학자들에게 인식론과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적 방법으로 철학적으로 유창하게 기독교를 설파함으로써 철학자들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실존주의라고 해서 키르케고르가 기독교의 객관적 역사성을 부인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키르케고르가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성육신이다. 성육신의 계시적 사건은 시간과 공간속에 일어난 역사적 객관적 사건임을 주목해야만 한다. 성육신 사건은 역사적이면서도 영원적이며, 객관적이면서도 주체적인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이해해야 하는 신비이다. 왜 키르케고르는 요하네스 실렌티오와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비기독교인을 통하여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을 말했을까? 원래 자기 모습은 잘 못보기 때문이다. 명목상의 기독교인에게 비기독교인이 말하는 기독교를 들음으로써 값싼 믿음을 버리고 참된 믿음의 정열을 가지도록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왜 완전하고 수준 높은 이상적인 기독교인 안티 클리마쿠스를 통하여 기독교를 말하게 했을까? 그 이유는 완전한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인인 가명의 저자를 통하여 물타지 않은 기독교의 본질을 가감없이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끝으로 어렵고 난해한 쟁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번역해주신 이명곤 선생님의 노고에도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윤덕영: 영남대에서 심리학을, 장신대 신대원에서 신학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종교철학(Ph.D.)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올라프 대학에서 키르케고르 도서관의 초빙연구원을 지냈다. 박사 논문은 《다석 유영모와 키르케고르의 실존사상 비교연구》이며, 역서로는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홍성사, 2018)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목사이며, 현재 경기도 파주에서 삼성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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