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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럴드 웨스트팔 저, 이명곤 역 <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

 

키르케고르를 보는 세 가지 관점

키르케고르는 '현대철학의 선구자' '실존주의의 아버지''그리스도교의 사상가'로 알려졌는데, 국내에서는 앞의 두 가지 관점에서는 많이 논의되었다. 최근 출판계는 그를 그리스도교 사상가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 홍성사에서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토니 킴 저)과《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을 출간했고, 샘솟는 기쁨사에서 《스스로 판단하라》(2017년),《자기 시험을 위하여》(2018년), 《고난의 복음》(예정)을 출간하였거나 출간할 예정이다. 키르케고르를 난해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교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 표현들은 무릎을 치게 한다. 쉽다. 감동적이다. 영감을 준다. 키르케고르가 어렵다는 인상을 넘어서려면, 그의 기도문이나 그의 강화집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기독교 실존주의란

철학이 위기를 맞았다. 형이상학의 종언을 고했다. 이론이 삶을 해석하고 풍요롭게 살도록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이제 로고스의 시대에서 파토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성중심의 로고스 철학이 기울고, 감성과 의지를 강조하는 파토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키르케고르는 파토스를 철학의 주제로 부각시킨 현대 철학의 선구자이다. 진리는 앎이 아니라 삶이며, 지식이 아니라 양식이다. 실존주의란 삶이 앎보다 앞선다는 사상이다. 삶이 이론보다 더 크다. 기독교 실존주의는 믿음과 행함, 은혜와 삶의 문제를 다룬다. 칭의의 구원은 결코 신앙의 목적이 아니며 신앙의 출발점이다. 기독교 실존주의는 성화의 구원를 주제로 한다. 오죽했으면, 루터파이면서 루터와는 달리 키르케고르는 야고보서를 가장 사랑했다. '햄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학이 진리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라면, 실존주의는 성서를 인간을 정립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보며, 분석하고 이해할 지식이 아니라 순종해야할 하나님의 약속이자 명령으로 본다. 아무리 많은 양의 정보를 습득한다하여도 인간은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식안에 안주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 실존주의는 절대 타자인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자신을 찾아가는 삶의 철학이다. 지식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단하며 선택하며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 없다면, 그 기독교는 허구이다. 이게 키르케고르가 처한 당시 덴마크의 루터주의 국가교회의 상황이었다. 당시 사회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너무 쉬웠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고난과 자기부인이 시작되는데, 당시 국가교회는 자기부인과 고난이 전혀 필요없는 종교였던 것이다.

 

기독교 세계에 기독교 새로 소개하기

기독교 문화권에 기독교를 다시 새롭게 소개하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임무였다. 기독교인이 아닌 가명 저자(요하네스 데 실렌티오와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와 최고로 수준높은 가명 저자(안티 클리마쿠스)를 활용하여, 기독교의 본질이며 무엇이며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가명 저자를 창안한 포스트모던적 기법은, 독자들에게 강압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내부자 기독교인이 아닌 관점에서 탁월하게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환상을 깨뜨려 부끄럽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키르케고르의 모든 저술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밝히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참 인간이 되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웨스트팔이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키르케고르는 초기에는 심미적 작품을 썼다가 후기에 종교적인 저술을 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독교적 관점을 염두한 작가였다. 키르케고르는 《저자로서 나의 관점》에서 "나는 처음부터 종교적 작가였고, 내 모든 저술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은 어떤 책이며, 메럴드 웨스트팔은 누구인가?

메럴드 웨스트팔은 현재 79세로 예일대와 뉴욕의 포드햄대의 교수를 지냈다. 그가 74세에《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를 썼다. 그는 원숙한 키르케고르 학자로서 키르케고르의 핵심 사상을 그의 저술을 분석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젊은 학자 토니 킴은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에서 키르케고르의 《철학의 부스러기》에 나타난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웨스트팔은 《 신앙의 합리성》에서 키르케고르의 가명 저자 3명이 쓴 5권의 유명한 저술을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꿰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독자에게 선물로 주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고 꿰어야 보배'라고 하는데, 믿음이라는 관점으로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개관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실존의 세 단계와 믿음의 본질

키르케고르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존에 세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재미를 추구하는 심미적 실존, 책임과 결단과 의무를 중요시하는 윤리적 실존, 고난과 자기부인을 강조하는 내면성의 종교적 실존, 계시와 초월과 믿음을 강조하는 계시성의 종교적 실존이 그것이다. 본서에서는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을 다루면서 '믿음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 믿음의 본질을 파악한 비기독교인

《공포와 전율》(1843)은 창세기 22장과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는 내용을 다루면서, 믿음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다. 딸을 죽인 입다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그리스의 아가멤논 왕의 경우와 아브라함의 경우가 어떻게 다른 지를 제시하였다. 《공포와 전율》도덕과 종교의 본질적 차이를 논증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은 결코 편안하게 하니라 끊임없는 내적인 싸움이다.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결코 지루하거나 무료하지 않다. 왜냐하면 믿음은 평생의 과업이지 결코 이 땅에서 완성되는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생활이 무료하고 지루하고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거나 진리에 대한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믿음에 들어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성령의 불씨가 없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희멸과 경탄(wonder)을 강조한다. 문제는 객관적인 정보, 완성된 교리에 머물러서는 이러한 희열과 경탄이 있을 수 없다. 《공포와 전율》에 나타난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다섯 가지를 저자는 말한다. 믿음은 평생의 과업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 신뢰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다. 믿음은 이성의 목적론적 중지이다. 믿음은 최고의 정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보라. 믿음은 결코 냉랭하고 차분한 감정이 아니라, 진리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체념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택하는 끊임없는 이중운동이다. 믿음의 본질은 역동적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헌신과 정열이며 결단이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기독교의 본질을 알지만 현재의 기독교의 일원이 되기를 꺼려하는 젊고 논쟁적인 철학도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철학의 부스러기》(1844)와 《철학의 부스러기의 결론적 비학문적 후서》(1846, 역자 이명곤은 《결론적 해설》이라고 표기함)에서 '진리는 주체성이다!'라는 주제를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방법으로 다루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헤겔의 사변철학과 기독교의 사변적 신학에 반대하여, 진리는 아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답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리이신데,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아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의 문제로 관점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칭의의 구원에 머물러서 성화의 구원이 등한시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처럼, 어떤 면에서 성경이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모든 교인이 말씀의 거울인 성경 앞에서 자신을 정립해야 하는데, 신학과 설교가 성경보다 앞서게 되었다고 키르케고르는 지적한다. "교회가 성경을 교인들에게서 빼앗아갔다"고. 진리는 단순한 신뢰와 순종을 요구한다. 그런데 아직도 진리가 정확한 해석이 끝나지 않았다면서, 삶으로 살기보다는 연구에만 몰두해 있다. 연구하고 해석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바른 해석'만을 찾느라고 '바른 삶'을 사는데 에너지를 쏟지 못하는게 문제라는 것이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소크라테스를 최고의 철학자로 칭송한다.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경구를 사용하여 철학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야, 이 바보들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내면성의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면, 기독교는 계시성의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차별화를 시도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절대 차이가 난다. 칼 바르트는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에게 크게 빚을 지면서, 말씀의 신학 또는 계시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본 회퍼는 키르케고르의 주체적 신앙에 영향을 받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갔다. 절대 역설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해할 수 없으므로 실족(offense)할 것인가, 이 결단이 믿음의 길에 들어서는 갈림길로 본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쇠파리'였듯이,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의 명목상의 국가 기독교를 괴롭히는 '코펜하겐의 쇠파리'를 자처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상기설(recollection theory)이나 산파술로 대변되는 이성과 계시에 대한 믿음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논증하고 있다. 철학과 믿음은 환원불가능한 차이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일체의 범신론(동일철학)을 배제하고, 절대 역설(성육신)의 계시(차이철학)을 강조한다. 키르케고르는 성육신을 기독교의 본질을 바라보는 핵심으로 삼고 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의 두 작품에서 말하는 믿음의 본질을 5가지로 소개한다. 믿음은 계시의 수용이다. 믿음은 죄를 넘어서는 행복한 정열이다. 믿음은 객관적인 불확실성에 대한 열정적 수용이다. 믿음은 도약과 분투이다. 믿음은 이성에 대항하는 파토스적 노력이다.

 

안티 클리마쿠스, 가장 원숙하고 최고로 이상적인 기독교인. 높은 영적 수준을 가진 사람.

앞의 두 저자가 간접적이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논증했다면, 안티 클리마쿠스는 직접적으로 수준높은 기독교를 제시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1849)과 《그리스도교 훈련》(1850)는 가장 직접적으로 믿음의 본질을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외과의사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밝힌다. 단순히 약을 먹고 파스만 붙이는 식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그런데 절망은 복음이다. 왜냐하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믿음을 통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된다. 이것이 절망의 변증법이다. 절망이란, 단순히 우울이 낙담과는 다르다. 절망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죽는다고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은 지독한 병이다. 이 절망의 치유는 믿음밖에 없다. 따라서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절망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하나님을 '자아를 확립하는 힘'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과 바른 관계를 맺고, 타인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키르케고느는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절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믿어야 한다. "너는 죄의 사함을 믿어야 한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훈련》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이룬다. 역사적 정보로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절대 역설인 성육신의 계시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와 동시대성을 이룬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고, 2000년 후의 우리라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동시대성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은 예수에 대하여 똑같은 거리에 있다." "동시대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 말은 '동시대성'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마태복음 11장 6절을 다루면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비천함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초대는 안락한 생활로의 초대가 아니다. 진리를 따르고 좁은 길로 가는 초대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불편한 삶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키르케고르는 십자가의 신학, 고난의 복음이 기독교의 본질로 본다. 번영의 신학, 성공의 신학, 영광의 신학은 고난을 왜곡하고 현세적이 차원에 머무르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신학의 모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지만, 번영의 신학은 "불가능은 없다"라고 신념처럼 외치게 한다.  《그리스도교 훈련》에서 실족의 가능성, 전투하는 교회 등이 중요한 주제이다.

 

나오는 말

이 책은 메럴드 웨스트팔의 원숙함과 폭넓은 안목을 보여준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의 핵심인 믿음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다. 믿음을 주제로 다룬 키르케고르의 중요한 저술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설교와 신앙서적처럼 은혜가 되는 류의 책은 아니다. 어렵고 난해한 면이 있다. 기독교를 어렵게 만드는 게 키르케고르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믿음을 당시 시대가 값싸고 천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위대한 철학자들 앞에서 현란한 철학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소위 지혜있는 자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익살꾼의 역할을 하기도하고, 진지한 영성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저술들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가 성경을 설교한 강화집을 보기를 추천한다. 난해하고 어려운 논쟁거리들을 번역하느라 수고한 이명곤 선생님께도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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