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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 

 

"이 책을 먹으라"는 제목 자체가 혁신적이다. 내 마음에 확 와닿는다. 그 이유는 한국의 종교적 열성이 대단하지만 정말 성경책을 영혼의 양식으로 먹고, 맛보며, 건강하게 성장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성경통독, 성경공부 등이 난무하지만 그것이 뼈와 살이 되고, 혈관에 피가 되어 흐르노 녹아지는 것과는 별개로, 오히려 교만하게 되고 독선에 빠지며, 심지어는 이단과 사이비로 흐르는 경향들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통쾌하기마저 하다. 읽고 싶다. 먹고 싶다. 

 

 그러나 "이 책을 먹으라"는 그렇게 쉬운 책은 아니다. 신앙간증이나, 일차원적인 '하라 하지 마라'식의 설교집과 같이, 독자의 입맛과 필요에 맞추어 나온 인스턴트 책과는 달리, 이 책은 깊은 내공이 들어가 있는 책이다. 일상적인 이야기와 함께 신학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유래한다. 밧모섬의 요한의 체험을 말한다. 거대한 천사가 한 발은 대륙에 한 발은 바다에 다디고 설교를 하는데, 그것을 성 요한이 받아적으려하니까 받아적지 말고, "이 책을 먹으라. 입에는 달고, 배에 내려가면 쓰리라." 특이하게도 처음에는 달지만, 나중에는 쓰다고 한다. 이것은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속사람을 완전히 수술하고 변혁시키는 것이라는 뜻이리라. 단순히 말씀을 내 입맛에 맞게 고르거나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주체가 되어 우리를 변혁시키리라는 것이다. 

 

 이 책은 세 부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성경의 삼위일체적 읽기 방식에 대하여, 둘째는 말씀묵상방법인 렉시오디비나에 대하여, 셋째는 오늘날의 성경번역에 대한 저자의 고민에 대하여 쓰고 있다. 흔히 두번째 말씀묵상법에 독자들이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지만, 필자는 1부가 이 책의 핵심이자 유진 피터슨이 한국의 독자들을 섬기는 가장 탁월한 부분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1부에서 성경이 어떤 책인지, 삼위일체적 성경읽기란 무엇인지, 성경읽기의 놀라움과 성경의 권위, 오늘날 성경을 대하는 독자들이 빠지는 '자아의 권위'중심의 문제점, 성경읽기와 주해, 예전 등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결코 쉽게 읽을 책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으라 스터디 가이드> 책이 나온 것은 당연하고 잘 된 일이라고 본다.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불행이요, 무지이다. 설령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도 성경의 권위보다는 '자아의 권위'를 더 중시하여, 체험을 강조한다든지, 성경을 자구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한다든지 한다. 저자는 한 마디로 성경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읽고 우리를 책망하고 교훈하고 바르게 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한다고 한다. 칼 바르트는 성경은 인간의 말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한다. 보나벤투라는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졌더라도 그것을 맛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라고 하였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계시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성경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뜻일 것이다.  

 

성경을 인격적으로 읽는다고 할 때, 성경을 비인격적으로 읽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 성경을 단순히 도구로 사용하여, 지식이나 정보를 추구한다든지, 실용적인 목적이나 원리만을 도출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영성이나 영적 사유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성경을 비인격적으로 읽는 그릇된 방식이라고 한다. 즉, 비인격적인 성경읽기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아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더 앞세우는 것은, 폴 리꾀르가 말하는 의심의 해석학을 넘어서 숭배의 해석학, 즉 '제2의 순진성'으로 나가는 진리의 현현을 맛보는 길이다. 훗설에서 시작한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은 바로 논리와 합리성으로 질식해 가는 현대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괄호치기와 판단중지를 통하여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내며, 진리를 맛볼 것을 충고하고 있다. "우리는 진리의 세계에 귀먹었으며, 진리를 겸손하게 경청해야 하리라."고 하이데거는 경고한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적 성경읽기란 어떤 방법인가?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 교리가 200~300년의 고민을 통하여 생겨난 배경을 설명한다. 어떻게 투박한 마가복음을 유대인의 경전인 모세오경과 같은 경전에 놓을 수 있는가? 어떻게 바울의 편지를 시편과 선지서의 탁월하고 위대한 경전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삼위일체 교리는 이러한 경전화의 고민에서 태어난 것이다. 성경전반에 흐르는 통일성과 일치성 속에서 성부는 창조하시고, 성자는 구원하시며, 성령은 복을 주시는 다양한 사역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나아가고 있음을 삼위일체라는 교리적 구성물을 통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만일 저자의 말대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다면, 그렇다면, 현대에서 중요시하는 개인의 자유는 말살되는 것인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한 개인을 성경의 범주안에만 가두고 제한하는 것인가? 성경이란 고대의 책이 우리를 미래로 더 나아가게 하는 발걸음을 묶는 것인가? 저자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근거를 '내러티브'(이야기)에서 찾고 있다.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력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지 제한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이야기에는 공백이 있어서 독자가 풍성하게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소지가 있다는 말이다. 내러티브, 이야기가 성경의 형식이다. 따라서 성경의 독자는 성경을 무슨 명령이나 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맥락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여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주해는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된다. 흔히 영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주해-이야기의 문법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파악함-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주해는 사랑의 행위이다"라고 정의한다. "주해가 없는 영성은 방종에 빠지기 쉽다"고 경고한다. 주해는 단지 학자들의 현학적인 뽐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고층건물을 지을 때, 그 기초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해는 건물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영성과 주해에 대한 유진 피터슨의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 영성을 추구하며 근거없는 주관주의와 말씀의 사유화에 빠져버린 영성의 흐름에 중요한 일침을 가한다. 필자는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은 본인은 말씀의 사유화를 더욱 중시하는 입장으로 흐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는 영성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유진 피터슨의 말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려 한다. 영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반드시 성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영혼에 대한 관심없이 읽으면 유익이 없다고 유진 피터슨은 말한다. 이 책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수박겉핥기식의 성경이해에서 좀 더 낯설고 충격적이며 놀라운 성경말씀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성경을 낯설게 읽자! 성경을 이미 안다, 이미 내 것이라는 자만을 버리자. 언제나 겸허히 성경의 인격적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경청하고 순종하도록 하자. 더 나아가 성경을 발로 읽자. 실천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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